“나의 흑역사 오답노트” (5)
“도선생님, 저랑 산책할까요? 싱글끼리.”
“네? 지금요?”
전남편 진상을 향해 ‘너 지랄하지 말고 가만 앉아 있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아주 공손한 표현으로 윤색되어 테이블 위에 던져졌다. 그때, 가만히 보고만 있던 첫사랑 필승이 끼어들었다.
“저도 싱글인데 같이 산책하죠.”
필승과 진상의 눈빛이 팽팽하게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출제 위원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리 셋을 쳐다봤고, 오선생은 “이게 뭐야? 나는?” 시샘의 눈빛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쿨하게 이 자리를 정리했다.
“전 별로 나가고 싶지 않으니 둘이 다녀오세요.”
그날 이후 첫사랑 필승과 전남편 진상은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다. 진상이 내 옆으로 한걸음 다가서면 어디선가 필승도 나타나 함께 섰다. 체육관에서 둘이 탁구를 치는 모습을 보면 수컷들의 찌질한 전쟁 같기도 했다. 필승이 강력한 스매싱을 날리면, 진상은 얄미운 서브로 점수를 땄다.
“반칙 좀 작작하시죠?”
“나경장이야말로 반칙 작작하시죠.”
필승과 진상의 경쟁을 보면서, 오선생은 부럽다는 눈빛으로 내게 두 가지 보기 중 누구를 찍을 것인지를 묻곤 했고,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필승.
진상과 달리 필승과의 흑역사가 까마득히 먼 15년 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진상과 만들어낸 흑역사가 막장 연속극 같다면, 필승과 있었던 흑역사는 로코 단막극 같다는 사실, 무엇보다 필승의 묵직하고 강력한 스매싱 로맨스가 진승의 얍삽한 서브 로맨스보다 내 마음에 들었다.
식당에서 밥을 타기 위해 위원들과 함께 식판을 들고 서있는데 필승이 슬쩍 쪽지 하나를 건내 주고 어디론가 향했다.
‘밥 먹지 말고 지금 수학과 전용 도서관으로 와.’
식당을 빠져나와 도서관에 들어가니 필승이 작은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일 먹는 식당밥이 물린다고, 회 한 접시 먹고 싶다.’고 오선생한테 무심코 했던 말을 이 남자 놓치지 않은 거다.
“이거 친한 조리사분께 로비해서 겨우 공수해 온 거야. 양이 얼마 안되서 너 혼자 몰래 불렀어.”
“대박! 고마워 고마워.”
광어회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털어 놓는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필승이 입가에 묻은 초장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나, 너한테 센 척 한 거 같애.”
“응?”
“애인 없다는 정보만으로는 성에 안 차네. 너 언제 결혼했는지, 누구랑 결혼했는지, 왜 이혼했는지, 애는 있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부 다 알고 싶어. 너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아졌어. 나 너가 좋다.”
미치는 줄 알았다. 심장이 이렇게까지 콩딱 거릴 수 있는 거야? 만약 필승의 무전기에서 선임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상황실로 오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필승을 수학문제지 위에 쓰러뜨렸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야외 잔디광장에서 체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필승이 안 보였다. 첫사랑 필승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전남편 진상도 안보였다.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노교수한테 물었다.
“나경장님이랑 최교수님 아직 안 나오셨네요?”
“최교수님 어젯밤에 부친상 당하셔서 나경장님이랑 빈소 가셨대요.”
한때는 나의 아버님이기도 했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거다.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아버님이요?”
“지병을 앓고 계셨다고 하던데. 그래도 청천벽력이지.”
수능 출제위원들은 상을 당하더라도 보안요원을 대동하고 잠시 빈소에서 분향하는 것만 허락된다면서, 오늘 숙소로 돌아올 것이라고 노교수는 말했다. 아버님 얼굴을 떠올리니 슬픔이 몰려왔다. 진상과 헤어지면서 아버님과도 인연을 끊었다. 아버님이 언젠가 ‘도혜야, 보고 싶구나.’ 문자가 온 적이 있었고, 나 역시 ‘아버님, 저도 보고 싶어요. 죄송해요.’라고 답을 한 적은 있지만, 뵙지는 못했다. 날 친딸처럼 대해준 시아버지를 뵈면 무너질 것 같아 찾아뵙지 못한 건데, 그 선택이 사무치게 후회됐다. 참고 참던 눈물은 숙소에 돌아와 터져버렸다.
“아버님.. 아버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상으로부터 맺어진 관계, 그 소중했던 추억, 일상들이 진상과 헤어지면서 사라져버렸고, 이것이 지금 그리움이 되고 미안함이 됐다.
해가 지고, 주변에 적막의 암흑이 깔리는 시간이 되어서야 진상과 필승이 돌아왔다. 진상은 만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런 진상을 필승이 부축해 숙소로 돌아오는데 진상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도혜야! 어딨어? 도도혜! 나와 봐! 나오라고”
진상의 고함에 응답한 것은 꽉 닫혀 있던 숙소의 창문들이었다. 하나둘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수학과 의원들은 진상이 서있는 현관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진상이 부르던 이름, 나도 산책로를 가로질러 진상 앞에 섰다. 한때는 내 남편이었던 이 남자, 내 어깨에 기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혜야!! 울 아버지 그렇게 투병생활 오래 하시더니 돌아가셨어. 엉엉엉...”
필승도, 오선생도, 노교수도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진상을 쳐다봤다. 위로가 필요한 시간, 그런데 진상이 어린아이처럼 징징대기 시작하면서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우리 이혼 끝까지 말리셨는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이혼하자고 했어도 네가 날 붙잡아 줬어야지!”
이 진상새끼, 슬픔의 마음을 단번에 회수케 만드는 진상의 땡깡에 욕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었다. 순간 필승을 돌아봤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망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상은 내 팔을 붙잡고 본격적으로 칭얼거림을 시작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응?”
잡힌 팔을 뿌리치며 나직하게 진상에게 말했다.
“너 지금 사람들 앞에서 꼭 이래야겠어?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야. 꼬장 부리지 말고 일어나.”
“내가 왜 이혼하자고 했는데? 너 유부녀였으면서 딴 놈이랑 잤잖아!”
이 진상새끼, 이 미친새끼. 순간 나도 이성을 잃었다.
“내가 왜 잤는데! 네가 딴 년이랑 안 놀아났으면 내가 그랬겠냐?”
“딱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어떻게 너까지 그럴 수 있냐고!”
“실수? 실수는 너 엿먹이려고 사고 친 나한테나 해당되는 거지! 작정하고 나 몰래 연애질한 게 무슨 실수야? 그게 어떻게 실수냐고!”
갑자기 그 악몽같던 시간이 떠올라 북받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필승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어두운 표정, 서늘한 눈빛, 그렇다. 흑역사의 팔자는 어찌해볼 수 없는 거다.
<6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Priw_ZJjkGE
<흑역사 오답노트> FULL-VOD https://www.youtube.com/watch?v=MaL_I4PnpDo&t=79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