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역사 오답노트” (4)
“지금 애인 없다며. 그럼 됐지. 내가 당분간 너... 특별 보호관찰 해야겠다. 갈게.”
첫사랑 필승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나던 날 변수가 생겼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다음 날 2차 검토위원들이 입소했는데, 그 중 한명이 나의 전남편 진상인 거다.
“으아악! 뭐야!”
첫 상견례 자리, 난 옆에서 씩 웃고 있는 진상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환영의 박수를 치던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뭘 그리 놀라?”
진상의 얼굴 한 번, 필승의 얼굴 한 번 쳐다본 후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니까. 왠지 그쪽이 낯이 익는데.... 아! 알겠다! 한마음 동물병원 다니시죠?”
“네?”
“거기서 뵈었나 보네요.”
그리고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눈치 백단인 진상은 ‘뭔가 있구나.’하는 생각에서인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회의 중간중간 내게 쪽지를 넘겼다. 처음 보낸 쪽지에는 ‘왜 나 모른척 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내가 못본척 하자 다음에 보낸 쪽지에는 ‘전 남편 만난 게 어때서?’라는 물음표가 적혀있었다.
그날 저녁 진상이 숙소로 찾아왔다. 당황스럽게. 필승이 보면 어쩌려구. 급하게 진상을 숙소 안으로 끌면서 물었다.
“그냥 남인 척 해주면 안 돼? 동동이는 어떻게 하고?“
“우리가 처음 만났다던 한마음 동물병원에 맡겼다. 왜? 너답지않게 왜 이래? 이혼한 거 들키기 싫어서 그래?”
“나 이혼한 건 다들 아는데 굳이 주변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 필요 없잖아.”
“너 나랑 있으면 어색해?”
그때 어색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경장입니다.”
수학에서 변수가 싫은 것은 이런 것 때문이다. 진상을 화장실로 밀어넣으며,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단도리쳤다.
“웬일... 이세요?”
“뭐야.. 둘만 있을 땐 말 놓지?”
“아.. 그게.”
자꾸 시선이 화장실로 간다. 그러자 필승이 무슨 약을 보여주며 화장실로 향한다.
“오선생님 룸 화장실에 벌레 나왔다고 해서... 이 방에도 붙여줄게.”
필승이 화장실 문을 잡는 순간, 난 필승의 손을 잡았다.
“아니!!! 괜찮아!”
“그래도 불이는 게...”
“지금 화장실에 냄새난단 말야!! 내가 할게.”
꼭 핑계를 대도 이 모양의 핑계를 댄다. 망했다.
“아... 그래. 그럼 꼭 붙여놔. 간다.”
필승이 나가고, 화장실에서 진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갔냐?”
“그래 갔다. 나와.”
“안 열려.”
순간 짜증이 났다.
“수 쓰지 말고 얼른 나오라고.”
“진짜라니깐?”
문에 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문을 거칠게 확 열어젖히자, 문에 몸을 기댄 진상이 튕겨져 나와 내 몸 위에 포개졌다.
“디질래?”
“의도치 않은 스킨쉽에 뭘 그렇게 오바해. 그나저나 우리 도선생님... 어느 틈에 담당경찰이랑 말 놓는 사이가 되셨을까?”
“시끄럽고 나가. 다신 오지 마!”
문을 쾅 닫아버렸다.
쾅 닫은 문이 진상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것일까? 다음 날부터 진상이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공식 회의 자리에서 내가 맡은 문제들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거나, 문제에서 표현된 것과 브리핑한 자료가 따로 논다고 비판을 하거나, 서술 표현법이 모자른다고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필승에게도 진상짓을 하기 시작했다. 두루두루 위원들을 챙겨야 하는 담당 경찰이 유독 한 위원하고만 격의 없이 지낸다면서, 공과 사는 구분하면 좋겠다며 훈계질을 했다. 그러면서 진상답게,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내게 마음을 털었다.
“대학 동창에 전남편에... 사람들 앞에선 두 남자 다 초면인 척 발연기까지 해야 하고. 도혜 너도 참 힘든 삶이다.”
“네가 그런 걸 왜 신경 써?”
“신경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경찰이랑 붙어있는 꼴이 영 거슬려.”
“또 입 터시네. 지금 네가 하는 말, 그 어린 여친이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아무렇지 않겠지. 걔랑은 완전히 끝났으니까. 도혜야, 난 아직 우리에게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넌 아냐?”
진상이 이런 눈빛과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난 자주 당황했다. 머리는 ‘절대 안돼!’하는데, 마음은 ‘절대 안 되는 걸까?’ 물음표가 붙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내 인생에 강력한 흑역사를 남긴 두 남자, 그 사이에서 내 마음의 계산기가 전 남편 진상보다 첫 사랑 필승이 정답이라고 말해주는 거였다. 아직 답안지를 제출하기 전이지만...
드디어 문제 출제가 끝났다. 수능까지 남은 날은 보름. 콘도 내 휴게실에서 자축 파티를 여는데 위원장인 봉교수가 ‘이제 수능 문제는 완전히 우리 손을 떠났으니 싱글들은 남은 시간에 연애 문제만 풀면 딱이겠다’며 진상을 쳐다봤다.
“최진상 선생님도 갔다 왔댔죠? 여기에 갔다 오신 분들 많아요. 오선생님도 그렇고, 도선생님도 그렇고.”
그때 대뜸 오선생이 진상에게 물었다.
“최교수님은 이혼을 원하신 거에요. 당하신 거에요? 저는요, 제가 먼저 하자고 그랬거든요”
진상은 내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제가 맞춰볼게요. 최교수님이 먼저 하자고 그러셨죠?”
진상은 나를 흘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어머 우리 찌찌뽕!! 그럼 도선생님은요?”
내가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자, 진상이 갑자기 산책을 제안했다.
“도선생님, 저랑 산책할까요? 싱글끼리.”
“네? 지금요?”
‘너 지랄하지 말고 가만 앉아 있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아주 공손한 표현으로 윤색되어 테이블 위에 던져졌다. 그때, 가만히 보고만 있던 필승이 끼어들었다.
“저도 싱글인데 같이 산책하죠.”
필승과 진상의 눈빛이 팽팽하게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5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Priw_ZJjkGE
<흑역사 오답노트> FULL-VOD https://www.youtube.com/watch?v=MaL_I4PnpDo&t=79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