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역사 오답노트" (3)
필승이 나간 후 홀로 남은 숙소에서 오답노트를 펼쳤다.
첫사랑과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 연애 흑역사의 첫 번째 챕터를 장식한 주인공.
일단 기억상실 컨셉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나에게 넌 기억할만한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마음을 담아.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문제 검토가 시작됐다. 수학문제 출제위원장인 50대 초반의 봉교수와 부위원장인 40대 중반의 노교수는 문제마다 부딪쳤다. 봉교수가 출제위원들에게 ‘참신한 문제 내느라 고생 많다.’고 이야기하면, 노교수는 ‘까놓고 말하면 참신하지도 않고, 뻔한 문항이 많다.’며 비판했다. 봉교수가 ‘문제에 정답의 단서가 제시되었는지를 분석하자.’고 화두를 던지면, 노교수는 ‘문제 의 독해보다 오답의 매력도를 높이자.’고 주장했다. 봉교수가 ‘왜 자꾸 자기 말을 자르냐’고 발끈하면, 노교수는 ‘왜 감정적으로 나오느냐’며’ 도발했다. 그 사이에서 필승은 가편집시험지가 든 봉투를 나눠주거나, 회의를 기록하거나, 흥미로운 눈빛으로 출제위원과 검토위원들을 살펴보곤 했다. 종일 참고서적을 뒤지고, 벽에 붙은 칠판에 계산공식을 써가며 문제를 풀고, 회의석상에서 각 문제별로 격론을 펼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그러면 위원들과 함께 식당에서 조촐한 저녁을 함께 했다. 그런 날이 며칠 지속되다보니 처음에는 서로 대립하기만 하던 봉교수와 노교수도, 과거의 흑역사 때문에 어색하기만 했던 나와 필승도 조금은 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문 밖으로 빨간 노을이 짙게 펼쳐진 어느 저녁, 봉교수가 조금은 친해졌다는 느낌이었는지 내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자, 술 대신 주스라도 한 잔 받아요. 도혜 선생님은 결혼은 하셨나?”
“했는데 이혼했어요.”
봉교수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오선생은 반가운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어, 나둔데!”
그러면서 필승을 향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경장님은 결혼 하셨어요?”
“아니요.”
“애인은요? 참고로 전 없는데.”
“없습니다.”
“아우 참 바람직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를 경계하며 물었다.
“도선생은요? 있어야할 텐데?”
“없는데요.”
봉교수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면서 말했다.
“여기서 2년 전에 눈 맞은 커플 있었는데 올해도 잘하면 나오겠구만. 도선생이랑 오선생은 갔다 왔고, 노교수는 연식은 있어도 안 갔다 왔는데... 나경장님은 어떤 스타일을 더 선호하시려나?”
가만히 있던 노교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봉교수님 지금 저한테 복수하시는 거죠?”
“무슨 소리. 난 노교수를 제일 미는데... 나경장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는지?”
“딱히 없습니다.”
오선생이 궁금하다면 재차 물었다.
“에이 빼지 말고 한 번 얘기해 봐요.”
“글쎄요... 수학 잘 하는 여자?”
“어머. 답변 센스있게 하시는 거 봐! 그리고요? 한 가지만 더요. 네?”
“일기를 오답노트처럼 쓰는 것도 매력있죠.”
순간 마시던 주스를 뿜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필승은 나의 첫사랑, 아니 짝사랑이었다. 잊고 싶은 첫 사랑이자 흑역사.
대학교 1학년, 입학과 동시에 내 눈에 찍힌 남자. 훤칠한 키, 딱 벌어진 어깨, 색이 짙고 선이 바른 눈, 필승을 찜했는데, 술이 원수였다. 대성리 MT촌에서 게임을 하다 나는 원샷, 원샷, 계속 잔을 비웠고, 어느 순간 만취 상태가 됐다. 옆에 하필 필승이 있었는데, 너무 잘생긴 거다. 필승의 팔짱을 끼며 러브샷을 하자고 마구 윙크를 날려댔고, 뽀뽀를 하겠다고 엄청 질척대다 그의 얼굴에 오바이트를 했다. 그걸로 끝. 난 그날 이후 캠퍼스에서 필승을 피해 다녔다. 너무 부끄러워서.
15년전 나의 첫사랑이자 흑역사이기도 했던 필승이, 오답노트에 적을 수밖에 없던 필승이 지금 미지수가 되어 다시 내 마음에 다가온다. 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다음 날 아침, 그날은 전체 회의에서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이기도 하고, 어제 필승의 멘트가 마음에 남기도 해서 엉덩이뽕 거들 위에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었다. 아름다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등에 지퍼를 끝까지 올리는 데 두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살 좀 뺄걸. 한 달 입소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김에 살을 빼야겠다는 마음이 아주 조금 생겼다.
프레젠테이션은 꽤 멋지게 끝났다. 그러나 긴장을 했는지 연신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메스꺼웠다. 점심을 먹지 말고, 좀 쉬어야할 것 같아 필승의 부축을 받으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깜짝 놀란 필승은 응급상황을 무전기로 알리고,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운 후 미친듯이 병원으로 향했다.
“증상이 어떻게 됩니까?”
응급 치료를 받은 후, 내가 좀 진정이 되자 필승이 의사에게 물었다.
“디스펩시아(dyspepsia)에요.”
필승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뭐죠?”
“소화불량이요. 장시간 타이트한 의상을 착용해 피가 통하지 않은데다 체기가 겹쳐 호흡곤란이 온 것 같네요. 퇴원하셔도 됩니다.”
15년 전 술에 취해 필승의 얼굴에 시원하게 오바이트를 했던 대성리 MT촌이 떠올랐다. 쪽팔리다. 설상가상 원피스 지퍼를 올리려고 하는데 이게 올라가지를 않는다. 이런 옷을 입었으니 숨이 안 쉬어지는 게 당연한 거다. 그때 필승이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자켓을 벗어 어깨에 걸쳐줬다. 매우 스.위.트.하게.
“또 호흡곤란 오면 곤란하잖아.”
필승의 미소에 또한번 호흡곤란이 올 뻔했다. 이 새끼, 어떻게 이런 설레는 미소를 장착하고 있는 거지? 순간 휘청거렸고, 필승은 마치 경호원처럼 흔들거리는 나를 번쩍 안아 차로 천천히 데리고 갔다. 얘, 무슨 영화 찍니? 웃음이 나면서도 세심한 경호에 어떤 감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 돌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면서 필승에게 물었다.
“너 왜 나한테 이것저것 안 물어봐?”
“뭘?”
“내가 언제 이혼했는지, 애는 있는지 뭐 그런 거.”
“지금 애인 없다며. 그럼 됐지. 내가 당분간 너... 특별 보호관찰 해야겠다. 갈게.”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난다. 저 남자의 끼부림이 싫지 않다. 호감 기울기의 각도가 점점 가팔라진다.
바로 그때 변수가 끼어들었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전 남편 진상이 나타난 거다.
<4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KvNPrgsDXgg
<흑역사 오답노트> FULL-VOD https://www.youtube.com/watch?v=MaL_I4PnpDo&t=79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