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역사 오답노트" (6)
“내가 왜 딴 놈이랑 잤는데! 네가 딴 년이랑 안 놀아났으면 내가 그랬겠냐?”
“딱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어떻게 너까지 그럴 수 있냐고!”
“실수? 실수는 너 엿먹이려고 사고 친 나한테나 해당되는 거지! 작정하고 나 몰래 연애질한 게 무슨 실수야? 그게 어떻게 실수냐고!”
진상의 바람, 나의 복수,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실수.
그 결과로 나는 진상과 헤어졌다. 흐릿하게 멀어져가는 그의 등짝을 볼 때 가끔씩은 쓸쓸함과 안쓰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굳이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진상 짓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혜야 잘못했어. 우리 그때 일은 쌤쌤이라 치고...”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만! 더 이상 까발릴 것도 없으니까 그만해.”
모두의 시선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필승으로부터 도망치듯, 진상으로부터 도망치듯.
캐리어에 짐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그래 괜찮아. 퇴소하면 다 끝이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 조금만 견디자.”
이때 ‘흑역사 오답노트’가 눈에 띄였다.
또 화가 났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그날 이후 퇴소를 기다리던 엿새동안 난 숙소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봉교수와 노교수와 오선생이 번갈아가며 노크를 했고, 문이 안 열리자 음식 담긴 배식판을 문 앞에 두고 갔다. 진상은 매일 아침 ‘미안하다.’면서 ‘이제 그만 나와달라.’고 읍소했고, 필승은 며칠 간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엿새째가 되던 날 카드키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선생님, 위원들 상태를 직접 체크하는 게 제 임무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동안 응답이 없으셔서 제가 문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나는 화장실 안에서 바디타올을 몸에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어제 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화장실 문이 고장 나 꼼짝 없이 갇혀 있었던 거다.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필승이 깜짝 놀라 내 몸을 감싸 안아 흔들기 시작했고, 의식을 차린 나는 필승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넘어진 거야?”
“그게 아니고... 화장실 문이 고장 나서 갇혀 있다가 깜빡 잠들었어.”
필승은 자신의 자켓을 벗어 내게 걸쳐주며 말했다.
“추울 텐데 얼른 옷 입어.”
“필승아. 나, 너한테 최교수가 내 전남편인 거 말하려고 했어. 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마땅한 기회가...”
“내가 너에게 고백할 동안 넌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문이 막혔다. 필승이 돌아서 나가려 하자 나도 모르게 마음에 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나, 최교수랑 재결합 해 말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좋을 대로 해. 난 더 이상 부부였던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
서운함이 몰려왔다. 마음에 없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래? 알았어! 그럼 오선생한테 얘기해 줘야겠네. 너에 대한 관심 접을 필요 없다고. 둘이 잘해봐.”
필승이 기막혀하며 말했다.
“도도혜. 넌 참... 내가 졌다. 좀 쉬어. 내일이면 퇴소다.”
필승이 돌아서는데 열린 현관문 사이로 얼굴에 팩을 한 오선생이 서있었다. 필승도, 오선생도, 나도 순간 어색해졌다. 필승이 자리를 떠나고, 오선생과 둘이 남았다.
“오선생님, 제 꼴 우습죠?”
오선생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오선생에게 속상한 내 마음을 하소연하듯 풀어냈다.
“저요! 수학교사면서 인생에 2점짜리 문제만 붙잡고 정작 4점짜리 문제는 풀지도 못했어요! 개망했다구요! 흑역사 오답노트까지 썼는데 왜 계속 틀릴까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오선생이 답했다.
“도선생, 흑역사가 나쁜 거에요? 세상에 흑역사 없는 사람도 있나? 저 사실 이혼 두 번 했거든요? 그런데 남자가 1도 안 질려요. 수학엔 등급이 있지만 인생엔 없으니까 좀 틀려도 되지 않아요? 점수 깎이는 것도 아닌데...”
뭐라고 할까? 아리지만 묘하게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 이 갇힌 공간을 나가기 전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틀려도 되니 선택하고 그 길을 가보는 것, 그렇게 새로운 역사는 만들어지는 거다.
먼저 진상을 산책로로 불렀다. 진상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도혜야, 나 맹세코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미치게 쪽팔리고, 미치게 미안하다.”
나는 물끄러미 진상을 쳐다봤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고, 이제야 비로소 풍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상에게 내 마음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나도 나한테 늘 쪽팔렸어. 그때 너 망치려고 날 망가뜨렸던 거. 그 일은 나한테 흑역사를 뛰어넘는 블랙홀 같은 거야. 앞으로도 여전히 후회할 짓을 하겠지만, 내 자신만큼은 지켜줄 거야. 그럴 거야.”
“도혜야”
“진상아. 나.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이혼을 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이별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로를 빠져나와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 필승을 찾아 보안실로 향했다. 어둑한 보안실에서 필승은 뭔가 고백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가방에서 오답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최근 페이지를 펼쳐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나필승, 걔는 왜 아직 미혼에 솔로일까. 누가 봐도 훈남인데. 분명히 결격 사유가 있을 거다. 월급이 차압되거나, 성격파탄자거나, 아니면 성정체성이 바뀌었나?”
필승이 피식 웃으며 억울한 표정으로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너, 수학과 연애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필승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 알아야 할 범위가 넓다. 두 번째, 이해해야 할 분량이 많다. 이 오답 노트에 나를 알 수 있는 요점정리 기막히게 잘되어 있어. 다 보면 돌려줘.”
나름 용기를 낸 고백이었고,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 남자, 대답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떠나는 대절버스에 올라타는 그 시간까지도 말이다.
“안녕히 가세요.”
내게 흑역사 오답노트를 돌려주면서 필승에게 들은 것은 고작 “안녕히 가세요.”였다. 그것도 아주 건조하게.
‘뭐야 이게 끝이야? 나 차인 거야? 또 오답인 거야? 왜? 왜? 왜!!’ 집에 돌아온 나는 부끄러워서 답답답해서 허공에 미친 듯이 발차기와 주먹을 날렸다.
다음 날 저녁, 동동이를 찾아오기 위해 진상 집에 들렸다. 진상은 저녁 약속이 있다면서 멋지게 빼입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가려나봐?”
“소개팅 애프터. 너만 잘 되면 내가 배 아파서 못 견디지.”
“내가 잘 되긴 뭐가 잘돼?”
“너 아직 필승한테 연락 안했어?”
“뭐?”
“너 아직 흑역사 뭐시기 노트 안 봤구나. 나경장 부탁으로 내가 노트에 심화 문제 4개 만들어 줬는데...그 문제 안에 그놈의 전화번호가 있지.”
집까지 미친 듯이 뛰어갔다. 구석에 처박아 둔 오답노트를 여니 진상의 말대로 수학문제 4개가 적혀 있었다.
“1번 정답 0.. 2번 정답 10.. 3번 정답 3168.. 4번 정답 3939”
재빨리 휴대폰에 번호 입력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 혹시... 나필승씨 맞나요?”
“아닙니다.”
힘이 쭉 빠졌다.
“아... 죄송합니다.”
“나경장님이 핸드폰을 경찰서에 놓아두고 급하게 순찰을 나가셔서요.”
“나필승 어딨어요 지금?”
여의도 샛강역 뒤편 유흥가 거리. 철제 입간판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한 취객과 대치하는 필승의 모습이 보였다. 취객의 커다란 스윙을 피한 필승은 날렵하게 그를 포위해 수갑을 채웠다. 필승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액션에 곳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수갑이 채워진 취객을 순찰차에 태우는 필승과 눈이 마주쳤다. 멋지고, 설레고, 벅차다.
필승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수학고수가 이제야 문제를 다 풀다니 실망인데?”
난 따지듯 장난처럼 필승의 명치에 훅을 날렸다.
“번호 알려줬으면 재깍 받아야지 경찰서에 놓고 다니면 어떡해! 너 찾느라 얼마나 헤맸는지 알아?”
필승이 갑자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잘 찾아왔네. 감동받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노트 제목 바꿔. 오답노트 말고 비법노트로.”
피식 웃음이 났다. 이때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취객이 창문을 내리고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선생님? 누구나 살면서 뻘짓, 똘짓, 진상짓, 미친짓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다가 아량 넓게 한 번만 합의를 좀...”
필승이 고개를 흔들자 우리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야! 나만 맛간 게 아니잖아! 지금 너희들 봐봐! 니들도 완전히 맛탱이 갔네!”
그렇게 필승과 함께 맛탱이가 간 연애가 시작됐다.
<끝>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Priw_ZJjkGE
<흑역사 오답노트> FULL-VOD https://www.youtube.com/watch?v=MaL_I4PnpDo&t=80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