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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윤 Oct 27. 2024

내 이름은 최성억. 전직 강력계 반장이다.

“그렇게 살다” (1)

드라마스페셜, 2019년 작품, 극본 최자원, 감독 김신일


내 이름은 최성억. 전직 강력계 출신이다. 서울의 끝자락 낡은 임대아파트에 거주한다. 

끝자락. 낡은. 임대아파트...

10년전, 경찰복을 벗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풍경이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퇴직 후 삶의 시작이었다. 안정적인 공무원 연금, 마포 일대에 보유한 30평대의 아파트. 문제는 자식새끼였다. 아들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부도로 연금을 깨야했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보겠다면서 가져간 주택담보 대출로 아파트가 경매로 날라 갔다. 불행은 겹쳐 온다고 했던가. 아들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속만 끓던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70대가 되어버린 나는 새까만 맨홀, 깨진 벽돌, 쓰러질 듯한 담벼락, 조잡한 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쓰레기 속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생활하고 있다. 기초 생활비를 받고 있지만 치솟는 물가를 버텨내기 어렵다. 아내를 나 홀로 돌보는 게 점점 쉽지 않아 요양병원에 입원시켰지만, 몇 달 째 병원비가 밀려 퇴원수속을 밟아야 한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병원에 가기 전 동네 후미진 곳에 위치한 현금인출기에 들렸다. 통장을 넣고 비밀번호를 찍는다. 통장 잔액 30,050원. 아내를 치매환자로 등록했더니 보건소에서 삼 만원이 입금됐다. 잔액을 꺼내 낡은 지갑 속에 넣는데, 뒤편에서 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섰다. 하얗게 샌 두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살이 새겨져 있었고, 낡은 티셔츠에 오래된 운동화를 신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에 아픔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가 안 좋은가 보다’라는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노인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가 응급처치를 하는데, 이 남자 기침을 하면서도 흔들리는 시선과 손이 자기 주머니를 가리켰다. 불룩한 무언가가 있어 꺼내보니 흡입기다. 급하게 입에 가져다대니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면서 거친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다.  


몇 분 뒤 구급대원들이 와 흡입기를 입에 대고 벽에 기댄 남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구급대원들 사이에 서서 이 초로의 남자를 바라보는데, 옆에 떨어진 핸드폰의 바탕화면 사진이 눈에 밟혔다. 병상에 누운 아내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낡은 셔츠, 오래된 운동화, 깊은 주름, 그리고 병상에 누운 아내.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닮은 남자는 119에 실려 갔고, 쓰러진 남자를 닮은 나는 119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아내의 퇴원수속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경비실 앞에 내린 태숙이 휘청거렸다. 나는 그녀를 업고, 택시기사가 트렁크에서 꺼내준 짐가방을 들고 낡고 허름한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하니 현관문에 통지서 하나가 붙어 있었다. 

‘연체 보증금 입금 독촉. 미입금시 퇴거 조치됨을 알립니다. (성운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다행히 태숙은 잠이 들었다. 얼른 통지서를 떼어 입에 물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전단지를 들고 집 앞 지하철 역에 섰다. 한 장 한 장, 두서없이 오고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단지를 건냈다. 대부분은 이 손길을 무시하며 지나갔다. 출근길이 끝나고 지하철 역이 한가해진 시간,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 보증금 담보로 대출을 받았는데, 재계약 기간이라 보증금을 올려줘야 해서요. 대출을 조금 더 받았으면 하는데요.”

추가 대출을 위해서는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정직원이 아니어서 재직증명서를 뗄 수 없다. 은행 직원에게 사정을 해보지만, 그 직원이라도 달리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전단지를 다 돌린 것은 퇴근 시간을 넘어 주변이 어둑해진 밤이 되어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경비실 앞에 펼쳐진 과일 자판에서 복숭아를 본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세 개에 오천원이요. 어떻게 드릴까요?”

너무 비쌌다. 돌아서는데 저 멀리서 “반장님!”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배 홍경위가 경찰복을 입고, 한 손에 복숭아가 든 투명 비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복숭아 보니 생각나서요. 형수님이 좋아하신다고 박스째 차에 싣고 순찰 돌았잖아요.”

복숭아는 너스레이고, 본론은 그다음부터였다. 아파트 놀이터 벤치로 나를 끌고 가더니 홍경위가 곧장 본론을 꺼내놓았다.  

“실은요, 반장님! 혹시, 취업 안 하실래요? 호박 나이트 장부장 기억하죠? 지금 상가 관리 하는데 거기 경비 자리요. 급여는 나쁘지 않고요, 4대 보험도 되는 정직원이구요. 사람 구해달라고 하도 귀찮게 해서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 사정을 아는 홍경위가 일부러 알아본 자리일 것이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숨통이 트이는가?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삶이 날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OXbhN8d2Hh0

<드라마스페셜 그렇게 살다> 다시보기 (15분 압축판) 

https://www.youtube.com/watch?v=G_e10a4T2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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