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다” (3)
“그냥 가게 두지. 그랬으면 당신은 일자릴 찾았을 거고, 난, 나대로 편히 눈 감았을 텐데.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데.”
병모가 흡입기를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라, 나는 툭 흡입기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차버렸다. 병모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다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나를 닮은 노인이 죽어가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봤다. 숨이 멈추던 순간 비닐에서 빠져나와 데구르르 굴러다니던 복숭아가 멈춰섰다. 병모의 손에 꼭 쥐어있던 핸드폰이 떨어졌고, 떨어진 핸드폰 바탕화면에 다정하고 행복했던 어느 순간의 가족 사진이 눈에 밟혔다.
119에 신고를 했고, 앰뷸런스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숨이 끊어진 병모 얼굴 위로 하얀 천이 덮였고,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에 몰렸다.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사람들 사이에 감도는 순간, 그 향기와 인파들 속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한 시선을 느꼈다.
“누구지? 본 걸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하얀 천에 덮인 나를 닮은 노인 옆에서 불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리자 뒤돌아선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목덜미에 문신 자국이 있었다. 문신, 체형, 걸음걸이, 언젠가 마주친 느낌이 드는 낯설지 않은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병모의 후임으로 대한빌딩의 경비원이 되었다. 정규직으로 경비원으로 채용되면서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빌린 돈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되었다. 아내 태숙을 데리고 치매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태숙을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을 하다보면 주변 이웃들이 죽은 병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날도 있었다.
“여기에 마스크 떨어뜨리고 갔다며? 경찰이 보고만 갔다잖아.”
“CCTV에 범인 얼굴이 안 찍혔대? 아우... 불안해서 어떻게 살아. 경비는 뭐하는 거야!”
평화로운 여름날이었지만,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는 CCTV와 목덜미에 문신이 있는 남자의 시선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해질 무렵 태숙을 휠체어에 태우고 마트를 가는데, 담배를 피며 마이클잭슨 춤을 추는 게 일상인 아파트 경비원 달수가 경비실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열 시 전에만 돌아오면 아무도 모른다니까. 내일이지?”
경비가 없을 때, 마음에 걸리는 CCTV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경비실에는 빌리진의 노래가 낮게 깔리고 있었고, 책상 위 모니터는 아파트 곳곳을 비추는 CCTV 분할 화면이 비춰지고 있었다. 경찰로 살아온 시간의 흔적 때문인지 경비실에 들릴 때면 늘 CCTV가 눈에 밟히곤 했는데, 지난 몇 주 동안 놀이터 쪽 CCTV와 재활용쓰레기장 CCTV는 고장이었다. 흘끔 분할화면을 훑어보니 여전히 그쪽의 CCTV는 블랙화면으로 꺼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달수가 왜 거기 서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CCTV 모니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 고칩니까?”
“오늘 아침에 고장 나서 아직..”
“일주일 넘게 안 나오던데?”
“그게... 사람 불러서 당장 고칠게요.”
달수의 게으름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휠체어를 밀며 아파트를 빠져나와 마트로 향했다.
해질 무렵 떨이 상품을 싸게 파는 마트 산책은 태숙과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김밥. 김밥 재료를 태숙 무릎에 놓인 장바구니에 하나하나 담은 후 과일 코너로 가 복숭아 상태를 살피는데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복숭아 한 알을 낚아채더니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복숭아를 잘라 태숙의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태숙은 불안한 얼굴로 몸을 뒤로 물리고, 나는 태숙의 휠체어를 꽉 잡아당긴 후 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를 느물스럽게 바라보던 남자는 복숭아를 베어물더니 유유히 뒤돌아섰다. 목덜미에 문신이 보였다.
그 남자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한 팔을 뒤로 꺾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누구야? 너 뭐야!”
“솜씨 여전하시네. 나 기억 안 나요?”
고개를 반쯤 꺾어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내 발목을 냅다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남자 옆에 그대로 벌러덩 넘어졌다. 이 남자, 몸을 추스르며 일어난 후 나를 내려 보며 말했다.
“나 다 봤수. 그날, 그 경비. 어떻게 죽었는지. 하필 내가 봤다고.... 최성억 반장님. 또 봅시다. 최반장님.”
“누굴까?”
집에 돌아온 나는 김밥을 싸며 이 남자를 기억하려 애썼다. 아내가 멍하니 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김밥을 먹던 시간, 난 어렴풋이 잊혀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후배 홍경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걔 말야. 특수 강도로 2003년 봄 천호동 사창가에서 붙잡은 놈. 박...”
“박용구요? 칼 잘 쓰던 놈이요?”
“그래, 칼잡이.”
“그때 십년 형 받고 들어갔다 나와서 한동안 잠잠했는데, 또 잡혔어요. 음란 영상물 촬영 유포죄로.”
“음란 영상물?”
“네. 지금쯤 출소했을 거고. 근데 왜요?”
“걔 신원 좀 알 수 있을까? 거주지나.. 직장이나..”
“무슨 일이신데요?”
“가능 해, 안 해?”
“가능은 한데요.”
“알아봐줘, 부탁이야.”
홍경위와 통화를 마친 그날 밤, 방검복을 입은 형사 둘이 찾아왔다.
“북부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현관문을 반쯤 열고 물었다.
“무슨 일이죠?”
<4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OXbhN8d2Hh0
<드라마스페셜 그랗게 살다> 15분 순삭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