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다” (4)
“북부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현관문을 반쯤 열고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근방에서 이상하다 싶은 거 목격하신 바 없으신가 해서요.”
“아뇨. 없는대요.”
“검은 모자에 마스크 쓴 남잔데, 단지 내 놀이터에서 부녀자 추행하거나 금품 뺏는 일이 벌어져서요.”
“거기라면 CCTV가 있을 텐데요.”
“하필 거기 CCTV가 고장입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형사들의 대답을 듣지 않고 현관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 한 형사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CCTV 고장이 고의적인 것 같다구요? 검은 마스크가 관리사무소에요?”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대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빼꼼 열린 안방 문틈 사이로 태숙이 보고 있었다. 아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별 거 아냐.”
“여보.”
얼굴에 불안한 빛이 가득했다. 아내의 팔을 잡으며 다독였다.
“별 일 아니라니까.”
“테레비가 안 나와.”
그날 밤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병모가 죽은 그날, 병모를 죽인 그날, 비릿한 웃음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용구의 모습이 잠자리를 괴롭혔다.
“칼잡이 박용구, 알아냈어요.”
경비실에서 악몽을 꾸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어느 오후, 후배 홍경위로부터 연락이 왔다.
“박용구 그놈,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요. 고시원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거 같고요, 북문시장 상인들한테 강짜 놓고 한 두 푼씩 뜯어내 근근이 사는 거 같더라고요. 신고도 많이 들어오고 그쪽 관할에선 아주 유명한 놈이에요, 근무하시는 빌딩 관리인 장부장요, 재혼한 부인 사촌오빠가 박용구예요. 장부장이 그 놈한테 경비 자릴 주겠다고 했었나 봐요. 반장님이 자기 자릴 뺏은 원흉이라고 생각하니, 그놈 꼭 피해야 해요.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되는 놈이에요.”
그날부터 박용구와의 꼬리밟기 놀이가 시작됐다. 용구가 늘 내 뒤를 밟는 느낌이 들었고, 나 역시 틈이 나는대로 그놈 뒤를 밟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뒤를 밟다 기찻길 옆에서 마주친 적도 있고, 아파트 단지 옆 도로에서 우연히 맞선 날도 있었다. 경비 일을 마친 후 박용구와 꼬리밟기 놀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밤이면 어둑한 조명 위에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태숙 홀로 덩그라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리모콘을 손에 쥔채 멍하니 낮은 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곤 했다.
“반장님 집이 저기죠?”
아파트 놀이터에서 용구와 마주친 어느 날 저녁, 용구가 말을 걸었다.
“하려는 짓이 뭐야?”
“신고. 누가 사람 죽이는 거 봤다고 신고하려고요.”
물끄러미 이놈을 바라보다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나 궁금한 게, 내가 특수 강도랑 이런 저런 거 다 합해서 전과 8범이거든. 사람들이 그러는데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극악무도한 놈이랍디다. 그런데 말요. 난 사람을 죽인 적은 없거든, 반장님은 죽였고. 누가 더 나쁜 놈이요?”
“대답해. 원하는 게 뭐냐고?”
“내가 입 다물길, 원하죠?”
“죽을 사람이었어.”
“병에 걸려 죽을 사람이었죠, 아직 안 죽은 사람이었고.”
“누가 전과자 말을 믿을 것 같나?”
“그럼요, 내 말은 안 믿죠. 내가 가진 증거를 믿죠.”
출소 후 용구는 괜찮은 일자리 하나를 찾았다고 한다.
몰카.
여자 화장실 칸막이 화장지 옆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일주일치 녹화한 것을 수거해 물품보관서에 넣어 두면 의뢰자가 수거해가면서 주급을 주는 일자리였다. 그러데 문제가 생겼단다. 청소를 하던 사람이 몰카를 발견한 거다. 더 이상 몰카 일을 할 수 없어 카메라를 수거해 돌아서던 밤, 우연히 빌딩 뒤편에서 죽어가는 병모를 쳐다보는 나를 보았고, 본능적으로 이 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생각해봤어,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반장님이.”
“...”
“머리 나쁜 나도 오래 생각할 거 없이 답은 딱 하나더라고. 배가 고파서, 살아야 하니까. 먹이는 하난데 입은 둘이고.”
“이유가 뭐지? 지금까지 가만 있었던 이유. 진즉에 그걸 가지고 형사를 찾아 갔어야지. 왜 내가 널 찾을 때까지 기다린 거지? 왜 날 찾아 온 거냐고?”
“머리 좋은 반장님이 그걸 몰라서 묻나? 거래를 하려는 거 아뇨?”
“...”
“원하는 게 뭐냐고 했죠? 손 털고 사람답게 사는 거. 그러려면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전과자가 어디 그게 쉽나? 하루 8시간 근무에 월 280만원. 4대 보험 되는 정직원. 반장님 물러나고 그 자리 나 주쇼, 그럼 그 즉시 이 영상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그렇게는 못해. 어떻게든 사례 할게.”
“사례는 필요 없어.”
“투병중인 아내가 있어.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고.”
“난, 투병중인 아내조차 없어. 대출은 꿈도 못 꾸는 전과자고. 누가 더 불쌍하지?”
“부탁이야. 사정이 있었어.”
“그때 기억나요? 당신 손에 수갑 채워질 때 나도 부탁했는데, 한 번만 살려 달라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그때, 반장님 그랬죠? 너 같은 사정에서도 모두 그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모두 그렇게 살지는 않지만 과거나 사정을 훌쩍 뛰어넘는 삶도 없다. 과거를 지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용구의 폰을 빼앗는데, 바닥에 놓치고 말았다. 떨어진 폰을 가운데 두고 용구와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안되겠는지 용구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쥐었고, 나는 잽싸게 발길질을 해 용구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칼을 놓친 용구는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고, 순간 용구의 속도와 힘에 눌려 나가 떨어졌다. 내 위에 올라탄 용구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세져가는 손힘과 섬뜩한 웃음 사이에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몸부림을 치는데 손 끝에 묵직한 돌부리가 잡혔다. 온 힘을 다해 용구의 머리를 찍었다. 손힘이 풀리고, 용구가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몇 걸음 못 가 푹 쓰러졌다.
용구의 맥박을 살피니 미세한 숨결이 이어졌다. 전화기를 꺼내 119를 누르다 순간 멈칫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용구의 핸드폰이 눈에 밟혔다. 살려달라는 용구의 눈빛도 눈에 밟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죽어가는 용구를 가만히 지켜봤다. 깜박거리는 가로등, 멀리서 들리는 고양이 소리와 함께.
<5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OXbhN8d2Hh0
<드라마스페셜 그랗게 살다> 15분 순삭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