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다" (2)
“반장님! 취업 안 하실래요? 호박 나이트 장부장 기억하죠? 지금 상가 관리 하는데 거기 경비 자리요. 급여는 나쁘지 않고요, 4대 보험도 되는 정직원이구요.”
출근은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양복차림으로 홍경위가 알려준 대한빌딩 1층에 자리한 부동산에 들어갔다. 10년 만에 마주한 장부장은 여전히 양아치였다. 은갈치 양복을 입은 장부장이 거만한 표정으로 박카스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이거 많이 갖다 바쳤는데, 기억나죠, 반장님?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현역 계실 때 반장님이 날 얼마나 골탕 먹였어? 융통성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양반이, 단속이다, 불법이다 오라, 가라. 형사들 다 받는 떡값 고고한 척 혼자 안 받으면 됐지 은팔찔 채우질 않나.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참. 사람 인생 언제 어떻게 뒤집힐지 아무도 몰라. 그죠?”
그렇다. 인생은 길고 언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른다.
“아무튼, 홍경위님이 부탁 부탁 하는 걸 보니, 반장님 말년이 어지간히 딱한 처지인 것 같아서, 내가 특별히 이미 오기로 한 사람 치우고, 반장님한테 기회 드린 거니깐 잘 하셔야 돼요. 그런데 일 시작하기 전에 반장님이 해결해야 할 게 하나 있어. 어렵진 않아.”
양아치한테는 어렵지 않지만, 고고한 척 살아온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경비로 일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 후임이라고,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고 해고통보를 하라는 거였다.
“천식에다 폐암까지 관 뚜겅 덮을 일만 남은 양반한테 야박하게 그만 나와라 하기가 사람 할 짓이 아닌 것 같고. 일도 익힐 겸 나오다가 반장님이 직접 말하는 게 확 깔끔하죠. 당연히 배우는 기간엔 급여 없어. 단독 근무하는 날부터 정직원 되는 거고.”
부동산을 나와 빌딩 뒤편으로 가니 경비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재활용 분리수거 중이었다. 낯이 익었다. 어제 현금인출기에서 만난 나를 닮은 남자. 이름이 병모라고 했다. 버려진 낡은 구두를 신고 좋아하더니, 구두에 묻은 흰색 페인트를 지우면서 내게 말했다.
“음식 쓰레기 썩은 내 진동하는 여기서 8년이오. 그렇게 번 돈 자식들 짐 안 되게 내 몸 하나 건사하고 마누라 병원비 대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데도, 이만한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병모가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후임이죠?” 그러더니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아직은 안 돼요!!” 당황해서 나를 닮은 병모를 바라보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일을 놓으면 아내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지들 엄마를 포기할 거예요. 난요, 죽는 날까지, 벌어야 해요. 숨 끊어지는 순간까지, 일해야 한다구요. 부탁입니다. 물러나 줘요.”
다음 날 아침 장부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밤새 고민했는데 안 하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궁하다고 남의 절박함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실버직업소개서에 들렸다. 상담원은 요즘 경기가 안 좋아 경비 자리 하나 얻는 게 만만치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겨우 내일 하루짜리 전단지 돌리기 일을 접수한 후 돌아섰다.
직업소개서를 나오는데 병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병모요, 어제 대한빌딩.”
“무슨 일로?”
“기억났소, 그쪽이 누군지. 목숨 구해준 은인인데 그냥 모른 척 할 수 없고.”
“됐습니다, 그럼 끊습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줄 것도 있고.”
그날 밤 대한빌딩을 다시 찾았다. 소주를 나눠 마시며 이 남자의 지난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살려줘서 고마운 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다며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5만원권 한 장을 꺼내 건내 줬다. 됐다고, 떨치지 못하고 그 돈을 받았지만 그냥 가기가 떨떠름했다. 과일가게에서 복숭아를 사 다시 경비실에 들리는데 병모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느낌이 싸해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쓰레기통 옆에 흰색 페인트가 묻은 낡은 신발 한짝이 보였다. 병모가 어제 주운 신발이었다. 재활용 쓰레기통이 나란히 서 있는 곳으로 급하게 달려가 보니 놀이터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 치는 나를 닮은 한 노인이 보였다. 복숭아가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 놓고, 급하게 병모가 입은 옷 주머니에서 흡입기를 꺼낸다. 그 순간이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이 남자가 내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들놈이 나 모르게 거액의 사망 보험을 들어놨더군요. 장사를 시작하는 아들, 유학 간 손자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딸, 모두 돈이 필요하죠. 보험금으로 지들 엄마를 보살피겠다고 약속도 했고. 날 왜 구했소? 그냥 가게 두지. 그랬으면 당신은 일자릴 찾았을 거고, 난, 나대로 편히 눈 감았을 텐데.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데.”
병모가 흡입기를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라, 나는 툭 흡입기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차버렸다. 병모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다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나를 닮은 노인이 죽어가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봤다.
<3화에서 계속>
<드라마스페셜 2024> 예고
https://www.youtube.com/watch?v=OXbhN8d2Hh0
<드라마스페셜 그랗게 살다> 15분 순삭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G_e10a4T2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