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교수 <불멸의 신성가족 2>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 가족>을 읽다보면 제도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이런 사례.
과거 경찰, 검찰, 법원 공무원들과 브로커가 한통속이 되어 노골적으로 사건을 말아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구속될 사안이 아닌데도 경찰에서 검사에게 영장을 신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원래 영장청구는 검사의 일이지만, 경찰이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하면 검찰이 이를 검토하여 법원에 청구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경찰에서 구속될 사안도 아닌데 영장을 신청하면 일단 당사자는 당황하여 담당경찰관에서 묻는다.
“어떻게 하면 구속이 안 될 수 있느냐?”
경찰관은 자신이 잘 아는 변호사를 소개해준다. 이들은 대개 경찰과 함께 수사를 했던 검찰 출신 전관변호사들이었고, 당연히 고액의 수임료를 요구했다. 이렇게 신청된 영장은 대부분 검사가 검토하는 단계에서 기각되거나 법원에 가서도 기각되게 마련이다. 애초 구속될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식의 구속사건 진행은 거대한 사기극에 가깝다. 이런 사기극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속사건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유가 분명한 만큼 해결도 간단했다. 영장실질심사제도가 도입되면서 구속 권한의 중심이 검찰에서 법원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법원이 영장실질심사를 실시하고 구속영장을 기각하기 시작하자 구속 사건의 숫자가 극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한다. 1996년 구속영장 청구 인원 15만 4000명, 실제 구속 인원 14만 3000명 2007년 구속영장 청구 인원 5만 9000명, 실제 구속 인원 4만 6000명. 10년 사이 실제 구속자수가 3분의 1로 줄어든 거다. 구속사건 감소에 따라 형사사건에서 변호인 선임 비율도 급격히 감소했다(같은 책, p. 207)."
이러한 변화는 영장실질심사제도가 도입되면서 나타난 극적인 변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는 숫자는 비슷한데, 구속자수가 3분의 1,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과거에 형사사건에 휘말려 구속된 사람들 중 3분의 2 정도는 사실 구속될 사안도, 형사사건에 해당할 건도 아니었는데 경찰-브로커-변호사의 거래 관계에 의해 소송에 휘말려버린 거다. 영장실질심사제도가 마련되면서 이런 나쁜 거래 관계가 줄어들었고, 이는 나같은 보통 시민들이 형사사건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도 크게 급감시켰다. 제도와 시스템의 설계가 중요한 이유다.
법조 문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었던 브로커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는 국선변호인 제도의 확대도 큰 몫을 담당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국선변호인 제도가 재판 시작 전 단계로까지 확충되었다. 이것은 작지만 큰 변화였다. 왜냐하면 국선변호인 제도의 확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통념을 상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였고 브로커의 활동무대를 좁히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국선변호인 제도는 검찰 기소 후에만 작동했다. 그러다보니 피의자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인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브로커들에게 부탁해 고액의 변호사를 수임해야 했다. 이게 불가능한 가난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수사기관의 프레임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피의자 단계부터 변호인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국선변호인 제도가 재판 시적 전 단계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자주 있었지만, 정책결정 단계에서 이 건은 자주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예산 부족으로 불가능했었다. 이것을 관철시킨 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의 사법개혁이었고, 이 제도의 도입과 맞물려 브로커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가난한 피의자들이 실질적인 수사 단계에서 변호인 서비스를 받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실제 국선변호인 도움을 받은 사람이 1998년 5만 9천에서 2007년 8만 7천으로 증가했다(같은 책, p. 208).
제도, 시스템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설계되면 현실에서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던 관행, 문화를 풀 수 있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 중요하고 시급하게 이야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제도 개혁 없이 지금의 검찰 문화, 부당한 명령이 오더라도 도무지 거절할 줄 모르는 천편일률적인 원만한 사람들을 찍어내고, 그 원만함도 어느 자리 이상으로 올라가면 뒤늦게 무서운 발톱을 드러내며 권력 지향적이 되는 문화의 혁신은 불가능하다(같은 책, p. 216).
이 책을 읽다보면 '불멸의 신성 가족' 안에 찌들게 묻어 있는 엘리트주의의 한계를 만나게 된다. 자기들이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을 해 모든 사건을 자기가 아는 지식과 프레임에 집어넣는가 하면, 위로 올라갈수록 보수적이거나 권위적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밑에서 도제 시스템으로 배우고 성장한 엘리트 일선 검사들은 시민들에 대한 서비스보다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는 어찌 보면 한국 검사들이 살아온 배경에서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동네가 검찰이다. 그런데 어렵게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검찰에 들어왔는데, 웬걸 이 동네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도제식으로 선배 검사로부터 모든 걸 배워야 하는 조직인 거다.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불가능한 조직인 거고, 말 잘 듣고 선배들의 요구에 잘 맞춰 일하는 사람들이 높은 등수를 받게 되는 세상인 거다. 이 상황에서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당연히 이때부터 천재 신동들은 원만함, 특별히 윗분들을 향한 원만함의 옷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다(같은 책, p. 258~262).
그 시간 속에서 만나는 검찰 밖 사람들은 “실력은 영 떨어지는데 그저 돈만 아는 변호사들”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는 당사자들”이다. 의사들이 세상을 아픈 사람 천지로 생각하는 것처럼 검사들은 세상을 나쁜 새끼 천지로 생각한다. 당연히 짜증이 나고, 그런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설상가상 도대체 하루에 처리해야 할 형사사건은 얼마나 많은지, 마음의 여유를 가질 틈을 주지 않는다(같은 책, p. 263~265)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해, 더 나아가 이 사회에 대해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삶, 그리하여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삶은 물리적, 정신적 여백에서 나온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전문직으로 가면 갈수록 이런 여백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검찰의 살인적인 업무량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미투 운동의 불씨를 당긴 서지현 검사는 한 달에 평균 200건, 초임 때는 400건 정도를 처리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형사부 검사가 한달에 검토하는 사건량은 평균 300건 정도라 한다. 그래서, 검찰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검사들의 일상을 지켜보다 보면 쉽게 그들의 아군이 되곤 한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를 알면 누구라도 그들의 고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p. 267).
검사들의 살인적인 업무량에 대해 한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무면허운전 때문에 벌금 70만원을 받고 자살한 사람이 있었어요. 검사들이 기준에 따라 벌금 50, 70, 100만원을 정하는 데는 2초밖에 걸리지 않아요. 그 결정에 따라 생명이 왔다 갔다할 수 있는데도 말이죠. 제대로 벌금을 정하려면 피의자의 재산 상태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에 재벌회장에게나 노숙자에게나 똑같은 벌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어요. 검사 한 사람이 한 달에 사건 300건을 처리한다면, 최소한 100건 정도에는 뭔가를 확인하고 조회하고 검사의 손이 가야 하는 내용이에요. 대충 조사한다 해도 한 달에 100~200명은 불러야 하는 상황이죠. 이렇게 시간에 쫓기다보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쉽게 막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간단한 폭력사건 하나만 하더라도 3-4명의 피의자, 피해자가 얽혀 있죠. 누가 누굴 때려서, 어떤 사람은 3주, 어떤 사람은 5주의 상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에도 서로 안 때렸다고 하고 자기는 맞기만 했다는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죠. 이런 사건이 송치될 때마다 검사가 피의자를 모두 불러 조서를 새로 만들고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여력이 안 되니까 대충 불러가지고 억지로 합의서 만들어가지고 합의하게 하고, 두 명은 기소유예하고 두 명은 벌금 조금 하고 그러거든요. 정말 부끄러운 일이죠. 검사가 되어가지고 시장판의 상인도 아니고, 얄팍하게 타협해서 진실하고 아무 상관없는 이런 정도의 작업들을 하다 보니 보람도 없고... 이야기를 충분히 못 들어주고, 설명해줄 시간도 없고, 기소하기에 적합한 말도 조서에 받아 적어가지고 퍼 넘기기 바쁜 구조 속에서 검사의 인간성은 날로 황폐해져가요. 대충 협상하고 대충 사무 감사에 지적되지 않을 정도로 넘어가죠. 늘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사건 피의자나 고소인에 대해 검사들이 피해의식이 있어요. 뭔가 자기 결정에 대해 신뢰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다들 하고요.(같은 책 p. 272~274)”
살인적인 업무 스케줄,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 피의자나 고소인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피해의식, 이런 상황과 마음이 합쳐져 어쩌면 검사들의 공격적 성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세상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비열하고 위선적이고 거짓말쟁이 천국이야. 이런 개같은 세상’.
이런 생각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몇 곱절 큰 거다. 이런 일상과 생각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물론 나같은 보통의 시민들이다.
보통의 시민들이 검사가 휘두른 공권력에 피해를 볼 때, 그러니깐 과도한 업무량,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문화, 정치권력의 입김, 개인적인 욕망 등등 다양한 이유들이 맞물려 검찰이 가진 공권력이 악용될 때 작동해야 하는 게 이를 감시하는 언론,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그런데 법조를 감시하는 사람들 역시 알고보면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배경을 지닌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특히 법조출입기자는 판사, 검사들의 감시 역할이 아니라 동반자적 관계를 맺는다. 검사들은 기자들을 이용해 여론을 한쪽으로 유도하거나 수사를 용이하게 하려하고, 기자들은 이런 요구에 협조하면서 친한 검사들을 활용해 호시탐탐 특종을 노리고, 기사거리를 얻으려 한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악어와 악어새같은 관계가 형성되고, 이에 더해 법조출입기자들은 오랜 기간 법조계에 머물다보니 판검사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법조기자를 3년쯤 하면 취재대상으로 한참 부대끼고 충돌하며 우정을 맺던 사람들이 지방근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것까지 볼 수 있다. 검찰 출입기자들은 주로 부장이나 차장검사를 만나는데 이들이 서울에서 일하다 잠깐 지방을 돌고 다시 올라올 때에는 요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같은 책, p. 288)”
이정도 되면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검찰과 법조전문 기자 사이의 암묵적 카르텔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검사와 법조전문 기자들은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동반성장하는 관계가 되는 거다. 이 관계망은 치명적 유혹이다. 왜냐하면 함께 권력을 나누는 것만큼 짜릿한 쾌감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 개혁을, 사법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섹터가 아삼육으로 형님, 동생하면서, 자신들의 수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실시간으로 만천하에 중계해주고 있으니, 이런 관계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국회도, 정부도, 시민도 아닌 검찰이 되는 거다.
한국 언론에서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검찰발 뉴스들이다. “법조기자들은 치열한 취재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거의 매일 국가를 뒤흔들 큰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나라보다 사건과 고소고발이 남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검찰이든, 언론이든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 연예인 스캔들 사건이 이를 묻어버리고, 검찰과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이 친구를 세상의 놀림감“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하면 한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10여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정아 사건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정아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신문에 신정아씨가 ‘오빠 사랑해’라는 이메일을 보냈다는 식의 기사가 매일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자기 입으로 그 소리를 했을 리도 없고 변양균 씨가 자랑을 하고 다녔을 리도 만무하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실린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분명 수사 담당자들밖에 없을 텐데, 사건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사생활 침해 기사들이 매일 지면을 채웠다.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누군가도 한심하지만 그걸 실어주는 기자들은 더 한심하다. 나중에 어느 신문의 기자 한명이 누드 사진 게재에 항의하다 사표를 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거기도 제정신인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라고 안도했을 정도로 기자들에게 실망했다(같은 책, p. 289)."
이런 일은 정.말. 비일비재하다. 검찰과 언론의 공생관계가 어떻게 한 인간과 가족과 공동체를 나락으로 빠뜨렸는가를 딱 10년 정도만 추적 관찰하여 기록에 남긴다면 아마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나 박경리 작가의 <토지> 정도의 분량이 가능할거다. 10년도 필요 없다. 1년만 관찰해도 단행본 10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검사들뿐만 아니라 법조전문기자들도 억울해할 거다. 그러나 출입처 중심의 취재 시스템 안에서 다른 매체보다 빨리, 다른 매체보다 깊게 기사 송고를 요구받는 업무 강도 속에서 잘 알지 못하는 보통 시민, 그것도 피의자의 이야기보다 검찰의 이야기에 의존하는 것이 좀 더 신뢰성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법조기자들의 공통의 생각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잘 팔리는 뉴스를 생산하기 위해 좀 더 선정적이고 좀 더 자극적인 야마를 찾는 것이 언론계 데스크들의 오래된 관습 아닐까? 이런 생각과 관성이 모여 누군가는 검찰과 언론의 합작품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검찰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찾다보면 구조적인 개혁 없이 우리 검찰이 내부적인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관성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기도 쉽지 않고, 조직문화가 변화를 받아들일만큼 수평적이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으며, 주변에서 이를 감시하는 집단들도 검찰 조직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나같은 보통 시민들의 몫이다.
우리는 법이라는 것을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할 뿐, 이를 통해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지 못한다. 국가나 기업, 그리고 힘있는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당하더라도 법조계의 도움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검사들이 사는 세계는 미지의 세계이며, 이 미지의 세계가 하는 주된 일은 강자들의 더러운 일들을 세련되게 덮어주고, 침묵하던 약자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이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거라는 어찌 보면 다분히 편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편향을 만든 것은 100% 정치권력과 검찰, 그리고 언론이다.
검사들이라고 이 세계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당연하지 않을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세계, 승진을 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더러운 짓도 해야 하는 세계,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건사고와 나쁜 새끼들에 둘러싸여진 세계, 여기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스카이 감옥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 감옥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저작거리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는 보이저 2호와 지구만큼의 거리가 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도 검사를 믿지 않고, 그만큼 검사들도 마주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검찰개혁의 하나의 줄기로서 공판중심주의가 쉽지 않은 이유다. 이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 사법시스템에서 의사소통은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말보다 전문가들이 주고받는 글을 선호했다. 거기에 사용하는 언어들도 전문가들만 아는 독특한 전문용어일 때가 많다. 글로 하는 의사소통에는 늘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서 글로 진행되는 논의가 결국 인신공격과 싸움으로 끝나는 것을 생각해보라. 오가는 눈길과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전달할 수 없다. . 법원과 검찰은 ‘사람들은 모두 위증을 하므로 말은 믿을 수 없다’는 틀을 만들어냈다. ... 우리 사법시스템은 오해를 계속 증폭시킬 수밖에 없으며, 기본틀이 공급자 중심이다. 모든 절차가 효율성을 핑계로 공급자 중심으로 마련되었고, 이 기본틀 속에서 당사자는 속 시원하게 질문 한번 던질 기회를 갖기 힘들다. (같은 책, p. 306).”
사실 이건 검사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법 시스템은 판검사들이 피의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바빠도 그렇게 바쁠 수가 없고 그러다보니 법정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여백이 없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 검사와 판사 수를 늘리면 되는 것 아냐? 그런 목적으로 로스쿨을 만들었고, 그런 취지로 로스쿨 제도는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것처럼 공급을 늘린다고 문제가 전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시민들에게 희망을 건다며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용기를 내 판검사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변호사라도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다. 일단 용감하게 판사님, 검사님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라고 말을 붙이고, 말을 끊고 무시하면 편지라도 써야 한다. 법률용어를 못써도 진실이 들어있고 원통함이 들어있고 억울함이 들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먹혀들게 되어 있다.... 검사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떨린다. 하지만 그 역시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너무 많은 일에 쫓기고 늘 내부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상급자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존재라 말을 거는 입장에서 배려해야 할 것은 있다. 어떻게 하면 짧고 효율적으로 생각을 전할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검사가 당사자보다 당시 상황을 더 잘 알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고 자신감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피의자신문조서를 꾸미든 진술조서를 꾸미든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려 노력하되 이야기한 대로 적히지 않았을 때는 계속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 검사가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면, “검사님 말씀을 너무 심하게 하시는군요” 또는 “반말은 안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꾸준히 이야기하는 거다. 검사가 지켜야 할 선을 넘는다 생각하면 부장검사에 가서 이야기하고, 안되면 차장검사를, 안되면 검사장에게 면담을 신청하는 거다(같은 책, p. 324~325).“
검찰개혁이라는 거대담론도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닐까? 법조계를 향해 말을 거는 것! 말을 걸자. 면담을 신청하자. 편지를 쓰자, 문서를 보내자, 이야기하자. 집요하게 꾸준하게~~~ <불멸의 신성 가족>을 깨는 것은 검찰청을 오가는 검사들에게 "어이 검사님,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거다.
별로 어렵지 않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