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 검사 <검사내전 2>
저자거리의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형사부 검사들의 경우 “타인은 지옥이다”를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의 연속인 것 같다. 피해자의 피땀눈물상처를 외면하는 냉정한 세상, 잘 구부러지고 쉽게 변할 뿐만 아니라 변한 후에는 완강해지는 기억의 면모, 거짓과 속임수와 다툼이 난무하는 현실을 아침부터 밤까지 마주하면서 “인생은 아름다워”. “인간의 선한 마음을 믿어요.”, “진실은 거짓을 이기게 되어 있어요.” 따위의 말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하는 동네. 여기가 바로 형사부 검사들이 사는 세계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사명감에 투철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도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웅 검사가 들은 하나의 사례.
“한 공익제보자가 있었다. 자기가 다녔던 회사의 공기청정기는 폐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직장까지 잃어가면서 문제 제기를 했는데 자신을 구속한 검찰의 처사가 너무 야속해 그때부터 회사보다 검찰이 더 미워졌다고 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 변명을 하자만 검사실에서 이타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여름에 눈을 보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행동 원인을 찾을 때 공익이나 이타적인 목적 따위는 고려해본 적이 없다. 결코 이타심이라는 가설을 세워본 적 없는 것이다.
서민 아파트 아이들이 등교하다 지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아파트에 울타리를 치는 사람들, 장애인 학교를 막기 위해 삭발하는 사람들, 신공항을 유치하기 위해 삭박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어두워졌다(김웅, 2018, p. 169~170)."
이런 고백을 마주하다보면 검찰에 필요한 것은 “어두워졌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 어두움 때문에 때론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검사실에서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을 거짓말쟁이, 사기꾼, 기억 왜곡자, 이기주의자로 전제할 때 분명히 수사나 기소에 있어 의도치 않은 잘못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같은 사람을 만나면~(넝담)
우리가 검찰 개혁을 이야기할 때 주목하는 공간은 특수, 공안, 강력, 금융조세 등 이른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서들이지만, 막상 내게 형사사건 관련 일이 터지면 90% 이상은 형사부 검사에게 배당될 거다. 형사부 검사의 삶에 대해 김웅 검사는 ‘집안일로 치면 청소나 설거지 같은 것이어서 잘해야 본전이고 좀체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려운’ 부서라 하는데, 당연히 검찰 수뇌부들의 관심은 나 같은 놈에게 터진 사건은 아닐 테고, 그런 사건들을 닦고 씻고 말리는 검사들에게 승진의 기회는 적을 것이며, 폼도 나지 않을 거다(같은 책, p. 201).
폼은 나지 않지만 형사부 검사들의 업무 강도는 고소 고발이 빗발치는 한국 사회에서 어마무시한데, 다종다양한 형사부 사건 중에서도 김웅 검사는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경쟁 위주의 입시 등 구조적 문제로 학교 폭력의 원인을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고 당파적이며 피상적인 말잔치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문화를 만든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학교폭력의 원인에 대해 매우 단호한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검찰개혁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다구요? 아니에요. 김웅 검사의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학교폭력이 심해진 원인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른들이 보인 행태 때문이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들어 조용히 끝내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 피해자들은 사라졌고 가해자들은 승리했으며 학교 폭력은 더욱 악랄해지고 한층 은밀해졌다... 학교도 사회도 인권전문가도...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피해자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한다. 가해자는 처벌 받지 않고 피해자는 전학을 간다. 우리 아이들은 그 과정을 모두 본다. 그리고 폭력과 잘못에 침묵하는 생존법을 배우게 된다.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화해와 용서의 실상은 이런 것이다. 여전히 윽박지르는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무릎 꿇으며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같은 책, p. 208~211)."
그는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더 강조하는 어른들의 세계, 가해자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의 선량함을 자랑하려는 어른들을 추악하고 황량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한다.
“어느 날 학교폭력 관련 회의에서 판사가 갑자기 이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안아준 적 있느냐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추악하고 황량했다. 내가 만난 학교 폭력 가해자 중 프리허그로 교화될 수 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자신도 했던 그런 포옹과 위로를 어떤 경찰관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경험의 깊이 차이에서 기인한다. ... 단순한 연민은 자신의 선량함을 자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식품이 될지 모르나 사회 전체로 보면 오히려 악이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재판정에서 눈물 흘리며, (뒤로는) 신고한 아이를 어떻게 괴롭힐까 공모하는 모습도 적잖게 봤다. 어찌나 영악한지 모든 것은 사회의 책임이고 자신들은 경쟁과 성적을 강요하는 사회의 희생자이며, 또 다른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는 변명도 빼먹지 않았다(같은 책, p. 212)."
그는 잘못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형사소송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상식이라고 강변한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처벌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처벌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학교 폭력에서 사회와 어른들이 피해자에게 용서나 화해와 같은 무책임한 말을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감동적으로 행복하게 해결했다고 믿고 싶은 감각장애자, 공감장애자 어른들의 폭력이라고 탄식한다. (구구절절 공감했다.)
"학교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던지는 고상한 말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말은 벤츠와 와인에 물릴 대로 물려 훌쩍 떠나는 라다크 여행과 같은 것이다. 경박할 뿐 아니라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아이들의 세상을 텔레토비 동산이라 착각하나 실상은 파리대왕의 섬에 가깝다. .. 그들은 학교폭력을 벗어나지 못해 차가운 아파트 옥상까지 몰리게 된 아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남은 화인을 결코 보지 못하는 감각장애자이자 피해자들의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공감장애자이다.
이렇게 가해자를 두둔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잘못에 대한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아통제 부족’이 생겨나는 것이다. ... 학교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 전력을 남겨 아이들의 대학 진학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인권 침해라는 주장은 공부와 경쟁에서는 승리만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낳는다. .
인권 의식은 자신이 귀중하다는 인식이 아니다.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은 굳이 안 가르쳐도 된다. ... 인권의식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아이들의 인권이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장래에 불이익이 되는 처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폭력을 쓰면 친구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왜 피해를 입은 아이들은 평생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고 가해를 한 아이들은 아무런 불이익 없이 살아도 되는가(같은 책, p. 215~216)."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도 보면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단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사법 개혁과 검찰 개혁에 있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하며 구체적 과제이자 두려운 요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깐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하는 거다. “마음대로 짓밟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고,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더욱 존엄한 것이 아니다. 김웅 검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존엄한 것은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 (같은 책, p. 217)."
백 번 맞는 말이다.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 존엄, 인권이라는 말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이던 내가 실은 한 번도 이 말을 이해한 적이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이 존엄과 인권을 대하는 감수성이 천박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더 나아가 2019년 국민들이 검찰 개혁을 원하는 것 역시 기억 속의 검찰이 “존엄과 인권”을 훼손한 피의자에게 응분의 대가와 책임을 물리는 데 실패한 것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김웅 검사의 이야기처럼 학교 폭력 현장에서 이 사회가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했던 것처럼, 공권력의 폭력 현장에서 검찰은 스스로 힘 있는 피의자가 되거나 그들과 함께하면서 피해자에게 화해와 용서와 망각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쉽게 검찰 개혁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