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삶은 투쟁이다. 카를 마르크스.

by 오윤


마르크스의 좌우명. 모든 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혐오하는 악덕. 노예 근성.
마르크스의 행복이란. 싸우는 것. 불행이란. 굴복하는 것.
마르크스가 제일 좋아하는 미덕. 단순함.



#17-1 kara marx.jpg 출처: nevada today


나는 마르크스를 애정한다. 그의 촘촘한 논리를 좋아하고, 강단있는 문장을 애정한다. 하지만 리카도의 예측과 단정이 현실과 거리가 있던 것처럼 카를 마르크스의 예측 역시 여지없이 비껴갔다. 돈의 세계는 그런 거다. 논리로 이어지지도 않고 예측은 부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돈의 세계에서 곱씹어 볼 요소들이 꽤 있다. 가령 이런 것.


“자본주의로부터 자선을 기대하지 말라. 사회 개혁은 절대 강한 자들이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약한 자들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Wheen, 1999/2001,p. 27)"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마르크스가 본 돈의 세계, 그 모습은 어땠을까? 마르크스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집중했고, 특히 노동에 집중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노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출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현대적 사회 제도는 공장이었다. 돈의 세계, 공장의 세계가 굴러가는 대략적인 논리는 이랬다.

1) 한 상품의 가치는 투입된 노동의 양(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2) 노동자들은 그 상품의 가치생산에 기여한 만큼의 보수를 받는다.

3)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100을 기여했다고 100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기업주는 자신의 몫을 잘라간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잘라간 몫을 잉여가치라 부르고, 이것을 자본가가 노동자들로부터 수탈한 가치로 바라본다. 수탈한 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자본가들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장, 기계와 같은 불변자본을 제공하고 노동자들과 같은 가변자본을 고용한다. 자본가는 최종 생산품의 가치가 투입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합을 초과하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잉여가치가 극대화되도록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변화시켜나간다. 잉여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노동시간을 연장하기도 하고, 투입자본을 줄이기 위해 저임금으로 부를 수 있는 어린이나 여성인력을 많이 고용해 가변자본의 비용을 줄이기도 한다. 가변자본으로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AI 등 불변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도 한다(이진경, 2004, p. 165~197).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르크스는 점점 더 노동자의 상황은 안 좋아지고, 결국 궁핍함에 몰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20세기의 역사 속에서 마르크스의 예측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왜 그럴까? 경제의 여러 주체 중 노동자의 관점에서만 돈의 세계를 봤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 듯 싶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들은 돈의 세계에서 티끌만큼의 가치도 스스로 창조하지 않는다. 정말 그런가? 마르크스가 빠뜨린 것은 상상력, 용기, 독창성, 경영능력과 같은 것들이다. 부의 창출이란 유형의 노동력과 시간을 투입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본가는 투자를 함으로써 목전의 쾌락을 포기하기도 하고, 이윤이란 자본가가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욕망을 지연시키며 참을성 있게 기다린 데 대한 보상이다. 따라서 이윤은 정당할 뿐 아니라 사회발전에 필수적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에 집착함으로써 너무도 많은 요인들을 무시해 버렸다(Buchholz, 2007/2009, p. 188~199).


#17-2 칼맑스.jpg 출처: platformc.kr

또한 자본주의의 몰락,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언했지만 이것이 이루어지기에는 돈의 세계가 굉장히 풍요로워졌다. 오늘날 일반 노동자 생활수준이 과거 왕족의 생활수준보다 높을 정도로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실업을 유발함으로써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체제라 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자본주의가 성숙해가면서 실업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주식회사의 발달로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생산수단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거의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특히 잉여가치를 위한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 이에 따른 노동의 가치화 과정(양화 과정)과 그 속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비참함이나 소외감과 관련된 이야기는 곱씹어볼만 내용이다. 돈의 세계는 자기 증식의 논리로 돌아간다. 새로운 자본을 기존의 자본에 추가하기를 욕망하고, 이 욕망은 고스란히 노동자의 삶에 전이된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전부 적중하지 않았더라도,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잉여가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 이 논리로부터 벗어난 자본주의 외부를 사유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아닐까? 즉 돈의 세계를 공부한다고 그 조건에 함몰되서는 안되는 거다. 자본은 모든 가치있는 것을 양화하고, 가치화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만들고자 한다. 즉 모든 것을 자본 증식의 메커니즘 내부로 끌어들이고 포섭하려 한다. 마르크스는 이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제언하고 실천하는데, 자본이 모든 것을 내부화하려는 돈의 세계 속에서 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같은 똘끼와 용기는 겸비해야 할 필수 아이템이다. 자본, 그것의 외부를 창안하고 창출하려는 실질적 활동, 의지, 욕망, 능력, 활력, 에너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이진경, P.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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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마르크스와 저널리스트 존 스윈턴의 인터뷰 내용 중 인상 깊은 한 단락, 그리고

우리는 바닷가에서 잔을 부딪히며 세상, 사람, 시간,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시대와 또 다른 모든 시대의 수다와 황폐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날의 이야기와 저녁의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내 마음 속에 존재의 마지막 법칙에 관한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마르크스 이 현자에게 그 답을 구하고 싶었다. 그가 언어의 깊은 곳들로 내려갔다가 다시 강조를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오던 도중 잠시 침묵이라는 공간이 형성되었을 때 나는 이 혁명가이자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숙명적인 말을 던졌다. 무엇입니까? 잠시 그의 정신이 물구나무를 선 것 같았다. 그는 앞에서 포효하는 바다와 해변을 불안하게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입니까? 나는 그렇게 물었고 이에 대해 그는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쟁이지! 처음에는 절망의 메아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삶의 법칙인지도 모르겠다(Wheen, 1999/2001, p. 523).



<참고문헌>

Buchholz, T. G. (2007). 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 : An Introduction to Modern Economic Thought. 류현(2009).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서울: 김영사.

Wheen, F. (1999). Karl Marx. 정영목(2001). 마르크스 평전. 서울: 푸른숲.

이진경 (2004). 자본을 넘어선 자본. 서울: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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