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다 13
사시사철! 입맛이 없다? 맛있는 반찬이 없다? 걱정은 접어두길. 천하무적 고추장이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 무엇이든지 고추장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도 무엇이든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 고추장은 최고의 반찬이었다. 고추장은 양념일 뿐 반찬이 아니라며, 논리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고추장은 명백하게 반찬이었다. 고추장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비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고추장의 매력을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멸치였다. 육수 낼 때 쓰는 고등어처럼 큰 멸치는 똥을 따고,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얇고 가느다란 작은 멸치는 통째로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집어 먹어도 좋았다. 물을 만 찬밥과 고추장에 푹 찍은 멸치만 있으면, 무더위 걱정 없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텃밭에서 뽑아 먹는 마늘종도 고추장과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밥을 먹다가,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바로 텃밭으로 가서 마늘종을 쭈우욱 뽑아, 그대로 고추장에 찍으며 됐다. 마늘종이 중간에 끊기지 않고 한 번에 쏘오옥 뽑히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듯 어깨에 힘까지 들어갔다. 야들야들하면서 매콤 달콤한 마늘종은, 달짝지근하면서도 칼칼한 고추장과 무척 잘 어울렸다.
경악스러울 수 있지만, 고추장에 햇마늘을 찍으면 매우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텃밭에서 막 뽑아온 마늘은, 껍질을 까면서 고추장에 찍어 오독오독 씹어먹는 재미도 있었다. 햇마늘은 수분이 가득해서 쉽게 까지고, 매콤함보다는 달콤함이 더 컸다. 하지만 햇마늘과 달리 묵은 마늘은 통증에 가까운 독한 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갉아먹는 지혜가 필요했다. 잘못 씹어서 어금니 안쪽에 마늘이 닿으면 매운맛이 아닌, 가혹한 통증이 기다렸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해 굳이 하늘 위로, 바닷속으로 갈 필요가 없다. 묵은 마늘 한쪽과 고추장만 있으면 언제든지 무시무시한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햇마늘만큼이나 햇양파도 고추장에 잘 어울렸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물이 빠져나오는 햇양파와 고추장은 매콤 달콤, 그 자체였다. 고추장 때문에 양파가 더 달콤하고 맛있어졌다.
신비로운 보랏빛을 품은 가지는 뽀드득거리는 식감과 떫은맛, 약간의 아릿함이 고추장과 잘 어울렸다. 입술 주변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도 모른 채 먹고 또 먹었다. 도시로 이사를 한 후, 생가지를 먹는 내 모습에 기겁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기겁했다. 나를 미개인 취급하는 친구들이 미개인 같았다. 생가지의 맛도 모르는 미개인! 솔라닌이라는 독 때문에 익혀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생가지를 고추장에 찍어먹고 탈이 난 적은 없다.
풋고추를 빼먹으면 섭섭하다. 고추는 된장이나 쌈장에만 찍어 먹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고추의 아삭아삭한 식감과 매콤함에 고추장의 달착지근함이 더해지면 아삭거리는 매콤 달콤함이 주는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고추가 너무 맵다면 오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오이는 반찬보다는 간식에 가까웠다. 텃밭에서 딴 오이의 거칠거칠한 가시를 손으로 대충 훑어 내고 장독대로 가서,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열고, 오이를 그대로 고추장에 푹 찔러 넣는 순서를 꼭 지켜야 했다. 그래야 더 맛있었다. 오이가 고추장 범벅이 되면 그대로 들고 아그작아그작 먹으면 훌륭한 간식이 되었다. 예쁜 종지에 고추장을 담고, 칼로 반듯하게 자른 오이를 조금씩 찍어 먹는 건, 오이에게도 고추장에게도 무례한 일이다. 물론 엉망이 된 장독대 때문에, 어머니께 혼나는 것을 감수해야 했지만, 오이는 반드시 고추장 항아리에 있는 힘껏 푹 찔러 넣었다가 먹어야 맛있다. 가끔 손에 묻은 고추장을 뒤늦게 발견하고, 핥아먹으면 그것 또한 별미였다.
상추쌈에 고기를 올려 먹는 건 촌스러운 도시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세련된 시골 사람들은 고추장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추가 질리면 호박잎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드러우면서 시원한 느낌의 상추와는 다르게, 호박잎은 거칠지만 따뜻했고, 묵직한 줄기를 고추장이 잘 품어주었다.
밥에 김에 싸서 꼭 간장에만 찍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거두시길 바란다. 고추장이 서운해한다. 하얀 가래떡에 고추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다. 달콤한 조청이나 설탕 대신 고추장에 찍으면, 그것이 바로 떡볶이였다. 절대로 잊지 말자. 요리의 고수는 최대한 단순하게 최고의 맛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맨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젓가락 끝에 고추장만 살짝 찍어 먹어도 맛있다.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고추장이 부러웠다. 고추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본연의 매콤함은 잃지 않으면서 어떤 재료와도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고추장처럼, 내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 모두와 잘 지내기를 꿈꾼 적이 있었다. 신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허황된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젠 그 꿈을 깼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노력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실은 그것 또한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