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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나 Oct 19. 2024

달콤 살벌한 단쑤시

음미하다 11

  똑같이 ‘수수’라는 말로 끝나는데, 옥수수는 토속적이고, 사탕수수는 왠지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주 먼 나라에 가야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사탕수수를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먹기까지 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숱하게 씹으며 단물을 빨아먹던 단쑤시가 사탕수수였다니! 사탕수수 사진을 보면서도 단쑤시와 연결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사탕수수는 절대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믿음이 내 눈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었다. 


 단쑤시는 옥수수 마디와 비슷하지만, 훨씬 가늘다. 옥수수 마디는 먹지 않았지만, 단쑤시 마디는 없어서 못 먹었다. 무척이나 가볍고 달콤한 속살과 달리, 단쑤시의 껍질은 무척이나 억세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자칫하면 손을 베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먹고 싶을 만큼 단쑤시는 달콤했다. 설탕이나 사탕이 주는 끈적거리는 인공적인 단맛과는 차원이 다른 경쾌하고 시원하고 아삭거리는 달콤함이었다. 


 단쑤시는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밭에서 직접 뽑아 먹어야 했다. 내 키보다 크게 자란 단쑤시를 뽑아서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마디를 끊었다. 단쑤시는 키만 클 뿐, 가느다래서 뽑는 것도, 마디를 끊는 것도 쉬웠다. 단쑤시 하나를 손질하면 약 대여섯 개 정도의 마디가 나왔다. 껍질을 깐 단쑤시를 한입 물고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단물이 나왔다. 단물을 최대한 쪽쪽 빨아먹으면 수수깡 부스러기 같은 찌꺼기가 입안에 가득 남았다. 무조건 ‘퉤 퉤 퉤’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입안에 찌꺼기가 남지 않고 깔끔해졌다. 


 어느 날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찬 식탐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먹으려는 탐욕을 부리다 결국 사달이 났다. 창고에 몰래 숨어서, 가슴 졸이며 껍질을 벗기느라 과한 긴장을 한 탓인지, 단쑤시 껍질에 손가락을 몹시 심하게 베인 것이다. 두껍고 날카로운 단쑤시 껍질이 왼손 검지의 세 번째 마디 중간 부분을 가차 없이 스쳤다. 어린 나이에도 그전과는 다른 큰 상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오른손으로 왼손의 상처 부분을 감쌌다. 하지만 꼭 감싸 쥔 오른손이 민망할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피와 함께 초록색과 노란색의 동그란 알갱이들도 흘러내린 것 같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피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흘러내린다는 사실에 겁을 먹어,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손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수건으로 왼손을 감싸고 꼭 눌렀다. 부모님께 혼이 날까 봐 뒷마당 구석에서 울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욕심을 부리다 다쳤다는 것을 알면 왠지 더 크게 혼이 날 것 같았다. 

혼이 나는 것보다는 아픈 걸 선택했다. 피가 멈출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검붉은 핏덩어리들이 손과 수건에 뒤엉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 내 손가락이 대롱대롱 흔들거린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가 되려면, 뼈가 끊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단쑤시 껍질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도끼는 아닌데, 불가능한 일이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공포의 크기가 만들어 낸 왜곡된 기억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내 왼손 검지 손가락에는 ‘⎾’ 모양의 흉터가 가장 아랫마디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병원에서 꿰맨 건 아니었지만, 상처는 그럭저럭 잘 아물었다. 아마도 기억만큼 깊은 상처도 아니었고, 많은 피를 흘리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흉터의 크기로 볼 때, 작은 사고는 아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병원 치료 없이 상처가 아문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내 몸이 갖고 있는 스스로 치유하는 힘이 능력을 발휘한 것이리라. 치유의 힘은 나만 갖고 있는 유별난 능력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약이나 수술처럼 빠른 효과를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 누구나 아기였을 때는 천사도 볼 수도 있고, 동물과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욕심이 커지면서 사라진다고 하더니, 치유의 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스로 치유하는 힘 대신, 빠른 치료와 처치에만 의존하면서 우리는 치유의 힘을 버리고 있는 것 같다. 


 ‘줄 서는 시간도 아까운 고객님’들을 위한 초고속 서비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느릿느릿하기만 한 치유의 시간을 기다려 줄 여유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여유 없는 삶이 마치 정답인 듯, 우리는 미친 듯이 빠르게 살아간다. 


 빠르기만 한 것도, 느리기만 한 것도 정답은 아니다. 적절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시대가 빠를수록, 어딘가 깊숙이 숨어서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유’를 찾아서 우리 삶의 균형을 맞춰보자. 분명히 있다. 우리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여유를 찾아서 여유를 주자. 우리의 생활에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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