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찌질함의 추억
날이 추워졌다.
막둥이까지 등원시키고 나서 두툼한 패딩 조끼를 방패처럼 두르고 오랜만에 오피스에 나왔다.
(우리 회사는 전일정 재택근무 중!)
꾸역꾸역 주차를 하고 나서, 장갑이 생각나는 추위를 넘어 스타벅스에 갔다.
이런 추위에는 습관처럼 토피넛라떼를 마셔야 하지만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
아쉬운대로 달달한 바닐라 라떼를 마셨다.
달다구리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김동률의 모든 노래를 랜덤 재생으로 듣기 시작했다.
추운 날,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김동률 노래를 들으면 몽글몽글 솟아 오르는 기억의 감각이 있다.
아니, 감각의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이야 애가 셋에, 애가 악을 쓰며 울어도 덤덤하게 바라보는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가능하지만, 나에게도 세상 찌질하고 비참하던 초보 엄마 시절이 있었다.
우리집 1호는 9월 중순에 태어났다.
크록스 신고 병원에 갔지만, 조리원에서 나올 때에는 초겨울 코트에 수면 양말을 신어야 할만큼 추워졌었다.
아이가 100일 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서른의 나는, 그렇게 내 집에 갇혔다.
왜 우는지도,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는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하는 내 유일한 낙은 남편이 퇴근 길에 사다 준 토피넛라떼 한잔이었다.
낯가림 심한 남편의 용기 덕분이었다.
지금이야 디카페인이 있지만, 그때는 그것도 없었다.
완모의 길을 걷고 있던 초보 엄마는 수유할때 커피를 마시면, 그것도 외출마큼이나 큰 일인 줄 알았다.
임신 전까지만 해도 - 아이를 낳고 난 지금도 - 하루 4~5잔이 우스울 만큼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더랬다.
그런데 육아 스트레스에 먹고 싶은 것까지 못먹어야 한다니, 문장 그대로 정말, 울고만 싶었다.
잘 참아 왔는데 그 날은 남편한테 유독 징징 거렸던 것 같다.
커피 커피 커피... 겨울이니까 토피넛 라떼... 커피 커피...
낯선 사람에겐 말도 잘 못걸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도 못하고,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못견디는 내 남편이, 용기를 낼 만큼 징징거렸나 보다.
퇴근길의 남편은 스타벅스에 들러서 토피넛 라떼를 사 왔다.
샷을 모두 빼고, 오직 토피넛 시럽만 넣어서.
그걸 라떼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토피넛 우유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주문하는 순간 직원이 포스기에서 고개를 들어 남편을 쳐다봤다고 한다.
주문을 한번 더 묻고, 샷을 모두 빼는게 맞는지 한번 더 확인했다고 했다.
남편은 추가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와이프의 사정을 덧붙였다.
아내가 토피넛 라떼를 먹고 싶어 하는데 수유 중이라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불편한 말 한 마디 더 붙이느니 잘못 나온 메뉴도 그냥 먹기로 결정하는 분인데, 나를 위해서 구구절절 질문을 받아 가며, 그렇게 매일 토피넛맛 우유를 사 왔다.
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찌질했다.
남편이 퇴근길에 사온 토피넛라떼가 아까워서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뒀다가,
100일도 안된 애 데리고 온갖 씨름을 다 하고는,
침대 구석에 앉아 눕이지도 못한 아이를 안아 들고 올다가,
도저히 못참겠다 싶어서 될대로 되라는 마음에 눕혀 놓고는,
부엌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서 5분이라도 현실 도피를 위해 고른 웹소설을 읽으며 다 식어 버린 토피넛 라떼를 마셨다.
이어폰 볼륨을 1로 해놓고 김동률 노래도 들었다.
난 왜 넓고 포근한 거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없나-
누가 나에게서 이런 여유와 안락함을 빼앗아 갔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훌쩍이면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코와 목에 힘을 잔뜩 주면서.
그정도의 여유도 아이가 깨면 사라졌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날이 추워지고, 토피넛라떼가 나오고, 김동률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나의 흑역사.
하지만 지금 또 누군가에게는 현실이겠지.
이 찌질함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애석하게도, 지금 이 힘듦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은 잘못 읽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당신과 나는, 우리는 힘이 들 것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이유로 힘들지는 않을거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자라면, 또 다른 이유로 힘들어질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 당신이 어떤 경험과 역사를 가진 사람이냐에 따라서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가 물어보면 "신생아 키울 때가 제일 편하다"고 말하곤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숨막히는 상황을 이겨낼만큼의 보람과 기쁨도 찾아온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여전히 힘이 들지만, 그래도 견디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 시간을 견뎠으니까 이만큼 이쁜 아이가 되어 있는 걸 보면, 전혀 다른 이유로 힘들지만 그래도 지금 이 시간도 견뎌야지 생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힘들지만 버티는 이유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힘들어도 버텨야 내 보물이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힘든 이유도,
엄마가 된다는거, 잘 하지도 못하면서 덜컥 저질러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 고난을 왜 견뎌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처음이라서, 지금 이걸 견디고 나면 보물이 빛나는걸 모르니까, 그래서 힘이 드는 것 뿐이다.
알고 나면 제법 견딜만한 일이 된다.
정말 미안하지만, 빈말이라도 육아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고 사실은 쉽고 할만한 것이라는 말은 못하겠다.
그리고 이건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다른 엄마들도 당신과 같다.
실컷 힘들다가 견디다가 작은 것 하나에 웃다가 자는 얼굴 보고 털어버리는 날을 반복한다.
당신에게도 토피넛 라떼와 김동률이 있기를.
하루에 2~3번쯤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우선되는 순간이 되기를.
다시, 찌질하던 겨울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