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Episode #5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오늘도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딸아이는 어느덧 34개월이 되었다. 세 번의 여름을 나고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하게 되는 동안 아이는 계절의 변화만큼 변화무쌍하게 성장했다. 그 성장의 속도만큼 나의 몸과 마음도 함께 발을 맞춰주면 좋으련만 육아는 항상 후회와 아쉬움의 연속이다. 이제 제법 말을 조리 있게 하는 딸은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한다. 단순히 좋고 싫음을 떠나 아이의 말속에, 씰룩거리는 눈썹 하나에 솔직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감정과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당장 어제 좋아했던 일들이 오늘에는 무언가 미묘하게 다른 상황으로 변화돼 있곤 한다. 그 자그마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 아이와 나 사이의 교감은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주 양육자가 된 지 8개월, 아빠로서 함께 한 3년의 시간. 나는 언제쯤 이 작은 생명체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걸까.
돌아보면 딸이 갓난아기였던 때부터 딸과 아내, 나 세 사람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느라 참 많이 고생했었다. 아이의 신호라고는 ‘응애‘가 전부였고, 우리 부부는 마치 스무고개를 하듯 정답의 고개를 넘고 넘느라 숱한 밤을 지새웠다. 그 단순해 보이는 울음 하나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 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아이와 우리가 서로의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 아이는 한 발짝 더 자라 있었고, 아내와 난 다시금 분주히 통역기를 돌려야 했다. 그래, 그랬었다. 우리들 사이엔 통역이 필요했다.
아이가 어느덧 자라 엄마 아빠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놀라움과 감동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이지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고 체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마저 느끼게 했다. 나는 지금도 아내에게 이 과정을 얘기할 때면 “아이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온 거야.”라고 표현하곤 한다. 자기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소통하기로 한 거니까. 물론, 아내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언어가 통일되고 난 뒤부터는 모든 일이 수월해지는 것 같았다. 배가 고픈 건지, 잠이 오는 건지, 무얼 하고 싶은지, 약간의 버퍼링만 있을 뿐 알아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이를 태우고 혼자 운전을 할 때 불안하고 조급했던 시간도 어느새 대화가 오고 가는 즐거움이 되었다. “아빠 눈 속에 내가 있네?”하며 쌩긋 웃는 아이의 한 마디가 행복이 되고, 아빠의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제일 맛있다는 말에 피곤이 눈 녹 듯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려 하는데 아이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나는 어디가 불편한 지부터 시작해 이리저리 물어보았지만 아이의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며 동네를 몇 바퀴 더 돌고 나서야 울다 지친 아이를 집에 데려올 수 있었다. 그 날을 시작으로 딸아이는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이유 없이 맹렬하게 울어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두렵고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 맘때 다들 그렇다, 아빠 손길이 엄마만 하겠냐 등등 주변에서 건네는 말들에 때론 위로받고 때론 상처 받으며 하루하루를 넘겼다. 그러던 중, 하루는 어린이집이 끝날 시간에 맞춰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여느 때와 다르게 원장 선생님께서 아이보다 먼저 나오셨다. 난 전달사항이 있나 보다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딸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게 됐다.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희진이가 많이 힘들 거예요. 하루아침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잖아요. 거기에다 아빠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은 욕구도 강한 아이예요. 힘이 드는데 아빠를 실망시키긴 싫다 보니 참아내는 과정에서 버거웠던 것 같아요.”
그랬다. 아이가 힘들어하기 시작한 그 시기는 정확하게 우리가 이사를 오고, 어린이집이 바뀌고, 워킹맘인 엄마의 빈자리가 커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환경에 아내와 내가 허둥대던 사이 아이는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짧은 순간 자책의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데, 선생님이 옅은 미소를 지으시며 한 마디 더 건네셨다.
“희진이가 아빠를 참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빠 얘기를 정말 많이 해요. 그 사랑의 크기만큼 잘 해내고 싶어 하다 보니 실수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마음껏 실수하게 해 주시고 응석 부리게 해주세요. 아직 한창 그래야 할 나이니까요.”
아빠의 육아는 유연하지 못했다. 한 없이 품어주던 엄마와 달리 고지식한 나는 실수에 관대하지 못했고, 칭찬과 격려에 인색했다. 나는 주체되지 않는 감정을 억누르며, 언제나처럼 내게 달려와 폭 하고 안기는 딸을 품에 안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꽤나 긴 자책의 시간이 지나고, 곧바로 난 사과의 단계로 돌입했다. 사과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 후로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힘든 과정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지금 돌아보면 아이는 내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어린이집 가기 싫어, 엄마가 보고 싶어. 나와 대화하고자 아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었음에도 난 아이의 떼가 늘었다 여기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세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의젓함이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고, 아이의 언어 너머에 담긴 진짜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자신하고 확신하는 순간 눈과 귀는 닫히기 마련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딸아이가 표현하는 수많은 감정과 메시지를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더욱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크기는 더더욱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아이의 언어가 단순히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손짓 하나, 발짓 하나를 거쳐 온 몸과 마음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조금 더 살을 부대끼려 노력하고, 조금 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딸과 나 사이에 통역기는 잠시 꺼놓아도 좋을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사랑은 최고의 언어이니까.
# 싱어송라이터 조제의 띵곡 : 나훈아 – 사랑 (1983년, 4집 - 사랑/하얀 새/18세 순이)
트로트의 황제, 살아있는 가요계의 전설. 1970년대 남진과 함께 시대를 양분했던 불세출의 트로트 가수 나훈아 님은 트로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은 저의 어머니가 ‘영영’과 함께 가장 좋아하시던 곡이어서 어릴 때부터 참 많이 듣고 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그저 어른들의 사랑 얘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찬찬히 들어보니 제 딸에게 전해주고 싶은 제 마음과 어찌 그리 닮아있는 걸까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