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단 소리로 배우는 그들을 위한 솔루션
사람을 살리는 손바닥만 한 기계가 있다?
글보다는 소리와 구전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전파되는 아프리카 시골에선 작은 정보 하나가 말라리아로 죽는 아이들을, 설사병에 걸려 탈수로 아파하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가나에 베이스를 둔 Literacy Bridge (LB)라는 NGO. 문맹률이 높은 가나에서 정보의 다리가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이름. 내가 일했던 유니세프 가나 사무소가 함께 일하는 파트너이기도 한 NGO.
우스갯소리지만 난 Literacy bridge 아시아지역 총괄 매니저로 보내준다면, 정말 유니세프를 그만두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파트너가 만든 토킹 북이라는 디바이스를 미친 듯이 donor들에게 팔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그 정도로 믿음이 크다.
토킹 북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언어가 다양하고 문해율이 낮은 가나에서 다양한 개발사업을 할 때 부딪히는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소리를 바탕으로 한 메시지를 통해 정보의 벽을 허무는 기계다. 영어로 하면 이렇다 "Talking book is the world’s most affordable audio computer designed specifically for illiterate people who have limited access to lifesaving information in their own language."
두 손에 딱 들어오는 작은 라디오 기계인 토킹 북. 쉽게 말하면 본인이 원하는 메시지를 간단한 인터페이스에 따라 찾아 들을 수 있고, 메시지의 스타일도 오디오 드라마, 음악, 지역 유지의 목소리 등을 통해 다양하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그 지역에 가서 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콘텐츠를 개발하고 실제로 녹음해서 같은 언어를 쓰는 커뮤니티에 배포한다.
이 토킹 북은 흡사 매주 배달 오는 잡지와도 같아서, 매 가정마다 1주일씩 사용 기간을 줘서, 그 안에 최대한 들을 수 있게 압박(?)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번 주는 영희네 집에서 들었다면, 담주는 철수네 집으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마을 전체를 계속 돈다. 이렇게 데드라인이 있으면 실제로 사람들이 일주일 사용기간 동안 최대한 활용해서 듣게 된다. 매주 우리를 압박하던 구몬 학습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피아노 뒤로 문제지 안 던져도 되는 거다. ㅎㅎ
토킹 북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보건, 위생, 교육, 젠더 같은 유니세프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른 파트너들의 콘텐츠인 농업 관련 정보들도 들어가 있다. 다양한 주제를 넣어서 사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주체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함으로, 메시지 사용권리를 프로그램 참여자에게 주는 참으로 인권 베이스 된 어프로치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파트너가 비용을 분담해서 한 기계에 다양한 메시지를 넣기 때문에 프로그램 예산도 절약되는 효과가 있다.
다른 매체와 비교하자면, 라디오는 메시지를 들으면 일하다가, 혹은 지나가면서 실제 노출은 되지만 대부분 메시지를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면 토킹 북은 내가 여유로울 때 찾아서 듣는 것이기에 집중도도 높고 교육효과가 더 크다. (물론 리서치를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요즘 뜨는 모바일 커뮤니케이션도 아쉽지만 SMS를 읽으려 해도 글을 모르면 정보 습득에 제한이 있다. 실제로 가나에서는 자기네 방언들을 말로는 알지만 실제로 쓰라면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소리 중심의 언어기 때문에 토킹 북의 소리 베이스 교육 방식이 효율적인 게다. 또한 모바일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토킹 북은 집에 틀어놓고 주변 가족까지 같이 들을 수 있는 효과까지 있다. 그리고 귀에 대고 들어야 하는 핸드폰보다 장착 스피커를 통해 더 오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토킹 북은 사용자가 궁금한 질문들을 기계에 녹음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시즌 콘텐츠를 개발해서 그 가정에게 다시 돌아가는 피드백 루프 또한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 토킹 북의 가장 큰 장점은 나 같은 프로그램 매니저가 원하는 모니터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기계지만 안드로이드 폰을 연결하면, 이 기계를 통해 몇 가정이 토킹 북을 들었고, 어떤 주제를, 얼마나 길게 들었는지, 피드백의 개수는 몇 개인지 바로 저장이 된다. 그 정보는 핸드폰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버에 저장이 되어서 실시간 dashboard에서 사용자의 노출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개발기관들이 인식개선 및 행동변화를 위해 라디오, 티브이, 커뮤니티 연극, 가정방문, 드라마 등등 많은 채널을 통해 노력했지만, 실제 비용 대비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증명하는데 애를 먹은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라디오에 광고를 하면 몇 명이 듣는지, 얼마나 메시지를 리콜하는지 등은 따로 리서치를 하지 않으면 시청률 집계도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냥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다. 분명히 사람들이 라디오를 가장 많이 듣는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들인 몇백, 몇천만 원의 광고 메시지는 들었을까? 그 돈을 준 도너가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냐고 하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매체 광고 효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사하고, 수치화하지만, 내가 일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킹 북은 우리의 메시지 개발 비용 대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자주 들었는지 정확히 계산이 가능하다. 한 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50센트 정도 든다 같은 계산이 되는 것이다. 실제 티브이 대비 비용도 훨씬 싸고, 사용자 만족도나 행동변화에 대한 데이터도 긍정적이다.
LB는 미국에서 개발경제학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들을 컨설턴트로 고용해서 영향평가(Impact evaluation)를 진행해왔다. 토킹 북 유저와 토킹 북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나누고, 시간을 두고 메시지를 노출시켜서 그들의 지식 (knowledge), 태도 (attitude), 행동 (behavior) 변화를 추적해왔다. 지난 2년간 유니세프 C4D 프로그램은 LB와 함께 40개 커뮤니티의 4만 명 정도를 대상으로 토킹 북을 활용했고 영향평가 결과는 이렇다.
토킹 북 사용자들 (treatment)이 비사용자 (control) 대비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는 모기장 안에서 자는 비율 (sleeping under LLIN)이 50%나 높고, 손 씻기 (handwashing)도 50%가 높고, 설사하는 아동들에게 ORS를 주는 행동 또한 33%나 비사용 자보다 높은 것으로 평가 결과 나타났다. 즉, 온전히 토킹 북을 통해 배운 것들로 인해 지식의 증가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 변화도 비사용자 그룹에 비해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설사나 말라리아로 죽는 아동이 많은 상황에서는 간단한 행동변화로 질병을 예방할 수 있기에 토킹 북이 가져오는 행동 변화의 의미가 참 크다.
토킹 북이 그럼 비싸지 않을까 물을지도 모르겠다. 토킹 북은 생산해서 가나까지 배달/통관하는 비용 포함 약 30불이다. 현재는 전기사정을 고려해 시골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전지로 운영이 되지만 앞으로는 핸드폰 충전기로 충전할 수 있게 제품 리폼 중이다. 나중에는 태양열로 충전하고 GPS까지 달아서 더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자고 제안을 해야겠다.
지난 2년간의 데이터가 대인 커뮤니케이션 (interpersonal communication)의 대안으로의 토킹 북의 효과를 충분히 보여줬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팀은 앞으로 3년간 100만 불 (12억)을 들여서 토킹 북을 50만 명 정도에게 활용하는 파트너십을 얼마 전 LB와 체결했다.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가정방문 모델을 넘어서 학교에 두는 모델, 보건소에 기다리면서 들을 수 있는 모델도 테스트해볼 계획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는 만물박사 김 박사님 같은 그런 느낌이다. 글을 몰라도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있는 디바이스를 제공해주는 토킹 북. 내가 가나에 있을 때까지 토킹 북은 나의 자랑스러운 파트너이자 연구주제가 될 것이다.
덧. LB의 창업자이자 CEO는 미국 사람인데 MIT 나와서 미군 핵잠수함에서 일하고 마이크로 소프트에서도 일했던 엔지니어다. 이 토킹 북으로 클린턴, 빌 게이츠한테 상도 받고 그랬다. 지난 10년간 LB를 이끌어낸 혁신가이기도 하다.
더 관심 있는 분은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