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지방에서 스키 점프 대회를 준비하는 우리들
난 유니세프를 지원하기 전에는 정말 유니세프 직원이 되고 싶다고,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관심이 있어서 알아보니 내가 가진 스킬이 유니세프가 원하는 것들과 조금 멀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유니세프는 상당히 분야별로 전문성이 요구된다. 보건팀은 거의 의사 + 보건학 석사 + 필드 경험을 가진 분들, WASH는 엔지니어 거나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팀은 저널리스트였거나 홍보 전문가들이, 젠더는 학위도 젠더고 유엔에서 이미 젠더 관련 업무를 최소 5년 넘게 한 분들이, 교육도, 아동보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심치 않게 (실무형) 박사 분들도 볼 수 있고.
일반적으로 국제개발이라는 애매한 분야로 경력을 쌓으면 섹터 전문가가 되기 힘든 구조다. 즉, 유니세프는 들어갈 때는 섹터 전문가여야 채용이 되고, 짬밥이 쌓이면 그때 제너럴 리스트 포지션인 매니지먼트 포지션으로 갈 수 있는 기회들이 열린다. 심지어 도너 관련 일(donor relations)들도 얼핏 보면 제너럴리스트 같았지만 그쪽 분야에서 수년 일한 선배들이 수두룩하다. 정부 고위급 관료들을 상대하고,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양자 기관들을 이해하고 유니세프의 전문분야와 연결시키는 부분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인 것이다. 그래서 유니세프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선가 스페셜리스트를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설픈 제너럴 리스트는 없다. 심지어 우리는 조달도, 파이낸스도 다 그쪽 전문가만 뽑는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도 옮겨갈 수 없다.
사실 내가 일하는 Communication for Development (C4D)도 들어오기 전에는 제너럴 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근데 들어와서 보니 동료들의 학위면 학위, 경험이면 경험 모두 관련 분야에 일가견이 있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경력을 가진 내가 얕게 느껴졌었다.
이렇듯 열정과 제너럴 한 국제개발 경험만으로는 유니세프에 들어오기가 참 힘들다.
유병재 씨가 전에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 세팅으로 콩트를 했었다. 거기서 이런 말을 비슷 하게 했다. “신입사원 면접에서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는다면 xx경력을 쌓을 기회는 주고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즉, 경력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건데 유니세프 경력이 없으면 들어오기 조차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유엔이 들어가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어떻게 들어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난 운이 좋았다. 정부의 도움으로 들어왔다. 난 코이카 다자협력 전문가로 들어왔지만, 외교부 JPO도 그렇고, UNV 프로그램도 그렇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들어오면 전문성에 대한 기대치가 사실 조금은 낮은 편이다. 유니세프 입장에서는 어차피 따로 비용(월급)이 들어가지 않지만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젊은 친구들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편이다. 여기에 제너럴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나도 처음에는 코이카 프로그램으로 들어와 유니세프 공채 프로그램인 NETI에 합격해서 지금까지 유니세프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유니세프에서는 매년 경력이 마일리지처럼 쌓이면 그게 스페셜리스트로 가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게 조직에 더 남고 싶고 비전이 보이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내가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확신 말이다. 나도 유니세프 7년 차가 되면서 내 분야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경험이 더 많으신 분들에게는 여전히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다른 조직에 있었다면 그런 기회를 쌓을 수 있었을까 자문한다면 정답은 아니다. 일단 한국에 있었다면 국제개발 분야가 아직 세분화가 되어 전문성을 쌓기에 적절한 구조가 아니고, 전문가가 되려고 해도 제너럴리스트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영역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이건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업계의 전문성에 대한 요구에 비해 조직의 관성이 아직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끔 한국에서 이런저런 연락을 받는다. 대부분은 유엔에 관해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내용들이다. 어줍지 않다게 조언을 해주며 느끼는 점은 한국에서는 참 전문가로 준비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이 뛰어나서 섹터에 전문성을 필드에서 구르며 쌓을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시스템 속에서 있다 보면 제네럴 리스트를 키워내는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유엔은 가고 싶다고 한다. 모든 유엔기구를 모르기에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유니세프는 그렇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섹터 전문성이 보이지 않는 그분들에게 무작정 전문성을 쌓고 들어오세요 하기에는 그걸 쌓을 곳이 딱히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차가운 조언을 하지는 못한다. 현실적인 조언인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오시라는 말을 하게 된다.
우리 개발 협력 업계가 더 전문화가 되고 세분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젊은 친구들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 무서운 전문성으로 필드에 나와서 당당하게 경쟁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형국은 눈이 내리지 않는 열대 지방에서 스키점프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다음엔 그럼 그들이 말하는 전문성이란 무엇인지 써볼 기회가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