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유엔을 꿈꾸었나요?

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

by 김형준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유엔에서 일하시는 것을 꿈꾸었나요?” 멋들어진 대답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듣고 싶어 하는 그런 대답 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유엔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고.



허나 내 대답은


“전 유엔을 꿈꾸거나 그렇지 않았고요. 그냥 이슈를 따라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인생의 5년 계획, 10년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멋진 분들을 보지만, 난 그렇지도 못할뿐더러 성격이 산만해서 하나에 집중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난 그냥 사람들을 따라왔을 뿐이다.

내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페이스 메이커 혹은 롤모델(?) 같은 분들이 있었다. 대학 1학년 여름에 갔던 유럽여행에서 병x가 영어 발음이 너무 좋길래, 나도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시험으로의 영어가 아니라 소통의 도구로 말이다. 군 생활 틈틈이 훔쳐보던 친구들의 싸이월드에서 본 유스클립이라는 대학생들의 단체를 알았고, 국제활동을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부분에 매료되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거기서 수많은 페이스 메이커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그냥 좋아 밤새면서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뿐이다. 나 스스로의 이슈가 없었지만 친구들에게 배웠다. 난민이란 것도, 인권이란 것도, 정보의 불평등이란 것도 남들이 던진 주제를 씹어먹으며 자랐다. 그 길에는 언제나 나보다 한걸음, 두 걸음 앞에서 길을 보여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 뿐만 아니다. 그렇게 연결된 곳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도 보게 되었다. 당시 코 x 김기 x 국장님도 그랬고, 앰네스티 김희 x 국장님도, 난 x 전부터 알던 원 x이형, 난 x 김성 x 국장님, 거기서 만난 분들 모두 나에게는 이슈를 삶으로 살아가시던 분들이었다. 그분들을 보면서 난 자연스럽게 삶은 저렇게 사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쫒아서 오던 길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가 생겼고, 그 주제로 뭔가 해보려고 학교보다는 학교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어설프지만 난민 스터디라는 걸 사람들과 하기도 했다. 그때 취업스터디 안 하고 난민 스터디했던 한량들(?)은 공교롭게도 다 진짜 난민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사람들을 만나며 나도 작지만 꿈을 꾸게 된다. 난민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 말이다. 그게 뭔지도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몰랐는데 말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운 좋게 UNHCR 동남아 지역사무소에서 컨설턴트를 하게 되었다. 난 정말 그냥 미국 떨어지고 미달로 가게 된 태국 교환학생이었는데 말이다. NGO에서 인턴 해보고 싶다며 안 되는 영어로 CV를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탈북자들 수가 늘면서 한국어로 프로세스를 진행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렇게 운 좋게 좀 더 큰 무대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hcr.jpg 이제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유엔 난민기구.


물론 거기서도 멋진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대학원 추천서를 써주신 남 x민 박사님도 그랬고, 같이 일했던 은 x 씨, 나중에 여기저기 현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다른 UNHCR동료들까지. 사람들을 보고 컸다. 그들을 닮고 싶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배웠던 난민이란 주제를 학교에 돌아와서 공부하다 보니 난민은 분쟁과 재난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중 분쟁이란 이슈가 그다음 주제였다. 학교로 돌아와 원래 하던 신방에서 정치외교로 4학년 때 복수전공을 틀어가며 분쟁에 집착했다. 국제분쟁. 왜 전쟁을 하고,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 역사를 보았고, 이론을 보았고,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틀들을 배웠다.



그렇게 분쟁과 난민이란 주제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그런 걸 가르치는 학교가 존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학교가 내가 석사를 하게 된 플래쳐였다. 당시에는 난민, 분쟁 같은 단어가 수업 제목이었다는 걸 홈페이지에서 보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었다. 그렇게 들어온 플래쳐에서는 난민과 분쟁보다는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게 Conflict resolution이었고, humanitarian assistance였다. 특히, Humanitarian assistance 쪽 수업을 엄청 들었다. Int’l NGO 아프리카 지부장으로 오래 일하다 강단으로 온 다니엘 교수님 수업을 들으며 분쟁-난민-인도주의 지원 등의 여기저기 떠다니던 이슈들이 한 꼬챙이로 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가르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늘에서 헬기로 식량을 나누어주는 사진을 보며 우리에게 물었다. “이 사진에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렇게 나누어주면 남자들이 대부분 식량을 가져가게 되고, 여성과 아동들은 이런 방식의 배분에서 제외됩니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분쟁과 난민, 그 속의 사람, 그 전의 일상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



내가 지금 하는 일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답을 다 찾지는 못하겠지만 여전히 난 이 질문을 들고 있다. 나는 과연 분쟁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과 아동들의 삶을 회복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7777.png 모든 아이들에게 기회를. 유니세프의 구호 중 하나.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언제부터 유엔에서 일하시는 것을 꿈꾸었나요?”라는 질문에 다시 답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이렇게 답할 것 같다.


그냥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에게 배웠고,
그들에게 배운 이슈들을 쫒아서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내가 꿈꾼 것이라면 내 주변의 멋진 사람들처럼 되는 꿈을 꾼 것 밖에 없다고.


그건 여전히 유효하다. 새삼 나에게 이슈를 던져주고, 영감이 되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Quotefancy-7018-3840x2160.jpg 인생은 목표를 향해 달리기보다 여정을 즐길때 더 많이 보고 감사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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