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과 기쁨을 상회하는 실존적 당혹감을 안고 집을 향해 터널터널 걸었다. 뚜렷한 형체를 지닌 물건을 손에 들고 걷노라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진짜, 새 물건을 들이지 않는 데 이골이 났구나.
나는 덕질을 하면서도 ‘물건’을 배제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덕질 없이 20여 년을 살았고, 반올림하면 근 10년을 제로웨이스트 지향인으로 살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형태와 부피를 지닌 상품 자체가 내 욕망의 범주 바깥에 있다고 해야 할까, 굿즈의 존재 자체가 인식 범위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의식중에도 평소 생활습관이 덕질에 배어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덕질에 쓰는 돈도 대부분 형체가 없는 ‘콘텐츠’에 집중되어 있다. 드라마로 최애를 처음 접해서였을까? 그렇다기엔 드라마 특전 영상이 담긴 블루레이며 DVD 앨범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왜 그쪽으로도 관심이 가지 않았을까?
답은 하나다. “물건을 새로 들이지 않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라는 삶의 대명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일단 나에게는 블루레이나 DVD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가 없다. 블루레이를 산다고 해도 재생할 길이 없고, 재생하지도 못할 물건을 산다는 것이 내게는 어불성설이다. 오직 블루레이를 재생하기 위해 지금까지 없이도 잘만 살아온 물건을 새로 들인다는 발상은 더더욱 어불성설이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매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새 옷을 사지 않은 기간도 몇 년째인지 모른다. 필요에 의해 구입하는 일본어 원서도 실은 주문할 때마다 고민한다. 해외 배송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탄소발자국이 발생하므로 되도록 꼭 필요한 책만, 그것도 몇 권 이상 모였을 때 한꺼번에 구입하려 애쓴다.
더구나 나는 물건을 들일 때 반사적으로 ‘버릴 때’를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야 혹시라도 그 물건이 불필요해졌을 때 분리배출이 가능한지, 폐기되었을 때 제대로 썩는 소재인지 등을 미리 알아볼 수 있을뿐더러 ‘이것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도 답하기 수월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아이돌 굿즈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덕후가 ‘굿즈를 버릴 때’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탈덕했을 때’를 생각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머리채 풀고 신명 나게 즐겨도 모자랄 판에 예쁜 굿즈가 탐날 때마다 ‘탈덕해서 버리게 될 때’를 생각해야 하는 덕질이라니…… 너무 가혹하다. 가혹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생각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고, 이미 머릿속에 든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이 없었다.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그야말로 ‘소비문화’의 정점에 있는 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비, 그것도 대량 소비 없이는 탄생하지도 존속하지도 못하는 산업이기에 더 많은 소비를 유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마음을 사로잡는 콘텐츠와 상품을 만드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랜덤이니 한정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여 불필요한 과소비를 조장하기까지 한다.
나 역시 입덕하지 않았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물건에 없던 욕심이 생기지 않았나. 좋아하는 마음을 물욕으로 치환해서 눈덩이처럼 불려 버리는 거대한 시스템이 이토록 가까이 있다.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그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어쩌면 내가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 자체가 지구 환경에 해를 끼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어떤 억울함이 울컥 치받쳤다.
내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해?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해외 배송 海外配送(かいがいはいそう 카이가이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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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영상 特典映像( とくてんえいぞう 도쿠텐에-조-)
감상용, 보관용, 영업용으로 세 개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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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쇼-요-・호존요-・후쿄-요-니 밋츠 카우!)
이제 굿즈 끊겠습니다.
これからグッズ卒します.
(코레카라 굿즈소츠시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