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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Jan 06. 2019

민감하지만 용감합니다

소심 끝판왕이지만 용감한 생활 히어로,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10살 때 엄마가 사준 멜빵치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4학년 언니들에게 ‘찍힐’ 위기에 처했다. 언니들이 나를 운동장 스탠드로 불러낸 것이다. 그때 가장 무서운 말은 “너 학교 끝나고 스탠드로 와”였다.
 
짝다리를 짚은 언니들은 으름장을 놨다. “앞으론 멜빵치마도 입지 말고 빵모자도 쓰지 마. 흰 스타킹도 신지 마. 찍히기 싫으면 말 들어라.” 찍히면 학교생활이 꼬일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소심하게 “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동안은 바지만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소심함’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단체 생활보다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고 수줍음을 타는 나. 모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모임에 나가면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안녕하세요. 음, 저는 에디터로 일하고 있고요. 제가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편이니까 이해해주세요. 안 웃어도 화난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 화났냐 는 말까지 종종 듣는 슬픈 짐승이라서, 미리 선수를 쳐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문득 곱씹어보는 거다. ‘괜히 소심하다고 말했나?’ ‘진짜로 소심해 보였겠다’, ‘에잇 다른 말 할걸’…. 이렇게 걱정하는 순간마저 굉장히 소심하고 남우세스럽긴 한데. 한편으론 스스로 헷갈렸다. 나 진짜 소심한가? 아니야. 억울하다! 그래서 소심의 상징, 일기장을 펼치고 나의 소심성을 파헤쳐보기로 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가던 어느 날, 밤거리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장소는 버스 정류장 앞, 20대 초반 남녀가 택시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내려! 내리라고!” 여자가 소리를 질렀고, 남자는 “이 미친X아 내리긴 뭘 내려?”라면서 강제로 택시에 올랐다. 여자가 계속 밀어내자 남자 다리가 택시 문밖으로 삐져 나왔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여자 머리채랑 어깨를 잡고 택시 밖으로 끌어냈다. 여자는 울면서 끌려나왔다. 남자 손에 잡힌 여자의 머리가 세차게 흔들렸고, 핸드백 속 화장품과 지갑이 바닥에 흩어졌다. 뚜껑이 열려 부서진 파우더 팩트를 보고 있자니 내 ‘뚜껑’도 열렸다.
 
“지금 여자한테 뭐하는 거예요? 당장 떨어져어어!!”
 
야밤에, 그것도 덩치 크고 폭력적인 남성에게! 대단히 용감한 장면을 떠올렸겠지만 사실 내 목소리는 메에에에~ 염소 소리로 울려 퍼졌다. 긴장한 탓이다. 만약 저 남자가 나한테 오면 뭐라고 하지? 내 몸에서 강한 곳은 이빨뿐인데, 저 사람 키 180cm도 넘어 보이는데? 저 손에 맞으면 나 날아가겠지? 공격하면 물어야 하나? 팔뚝을 물어? 저 털 난 팔뚝을? 싫어 싫어!
 
오만 상상이 교차하는 짧은 시간이 지났고,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에이 씨X.”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오~ 뭐야. 나 좀 멋있었는데? 내 말을 전해 들은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염소인 줄 알고 도망갔나봐.”
 
“대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다.” 국어사전에서 찾은 ‘소심’의 뜻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위험한 상황에서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성이 부족했다.
 
고3 땐 어떤 언니의 가방을 낚아채 도망가는 소매치기를 쫓아가 붙잡았다. 마침 운동회 계주 4번 주자로 한창 연습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도망치기 전문인 소매치기도, 100m를 13.8초에 주파하는 내 다리를 이기진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소매치기가 칼로 찌르면 어쩌려고 해?” “그렇게 덩치 큰 남자한테 맞으면 너 날아가”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난 당당했다. 지갑을 빼앗긴 채 길바닥에 쓰러져 울던 그 언 니는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약자가 나쁜 일을 당했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실제로 나는 꽤 정의롭고 대범한 사람인데, 현실에선 여전히 걱정 많은 소심쟁이일 뿐인 걸까?
 
책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을 읽다가 작은 위안을 얻었다. 이 책에 따르면, “소심하다고 생각했던 당신은 사실은 소심한 게 아니라 민감할 뿐”이다. 책에는 민감성 테스트도 나와있는데, 테스트를 하기도 전에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싫고 불편한 것을 잘 느낀다. 매운탕에 빠진 파리는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무례하거나 비겁한 행동을 보면 화가 나서 손이 덜덜 떨린다.
 
예를 들면 뒷담화를 하다가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것? 아니면 약한 사람의 약점을 잡아 무안 주기! 그리고 상대방이 지금 편안한지, 우울한지, 불안한지도 느낀다. 물론 과학적이진 않다. 관찰을 많이 할 뿐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드러낼 때마다 어른들은 주의를 줬다. “그러면 안 돼. 그렇게 행동하면 못된 거야. 사람들이 싫어해. 너무 예민해. 둥글어져야 해.”
책에 따르면 민감한 성향이 지지를 받지 못할수록 수줍어하는 태도는 더 심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소심하다’고 말하 는 그 태도 말이다.
 
나는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민감한 것이 아니었 을까? 몸싸움으로는 남자를 이길 자신이 없고, 긴장하면 염소 울음소리 따위를 내는 나. 이제는 이런 나를 소심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나는 약자였으니까 약한 사람에게 좀 더 공감을 잘하는 사람. 나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 그래서 조금 더 정의로울 수 있는 사람.
 
며칠 전, 엄마랑 밥을 먹으면서 ‘멜빵치마 사건’ 얘기가 다시 나왔 다. 10살 때 빵모자를 쓰고 멜빵치마를 입었다가 언니들한테 찍혔던 그 날. 그런데 엄마 왈, “얘, 너 무슨 소리야? 너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어.” 엄마가 말한 전말은 이랬다.
 
“그때 너 언니들이랑 싸웠어. ‘우리 엄마가 사준 건데 제가 뭐 잘못했어요?’라면서. 그래서 언니들이 찾아와서 사과했잖아!”
 
세상에. <식스센스> 급 반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용감한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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