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다 같이 먹어주게나

엔도 슈사쿠의『깊은 강』을 읽고

직장 생활 4년 차에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막연한 고립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엔도 슈사쿠가 1993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작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쓰였다. 작가는 신장병으로 투석을 받으면서도 이 책을 기어코 완성했다. 삶의 끝에서도 작가가 꼭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에선 인도 패키지여행에서 서로 만난 일본 관광객들의 사연이 교차된다. 인도를 여행하는 이유는 관광객마다 다르다. 중년 남성 이소베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제야 빈자리를 실감한다. 늘 곁에서 군말 없이 밥을 차려주고 옷을 다려주던 아내는 유언으로 특이한 부탁을 남겼다. 환생할 테니 자신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30대 여성 나루세는 대학생 때 그녀가 차버린 순진한 남학생 오쓰를 떠올린다. 실연의 상처를 경험한 뒤 성직자가 된 오쓰가 인도 빈민가에 산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사진작가 산조는 인도의 가난한 풍경과 바라나시 강가의 화장터를 찍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책을 읽으며 다른 낯선 사람들의 삶을 깊숙이 상상해 보았다. 특히 내게는 기구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기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미얀마의 정글에서 말라리아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전우인 쓰카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 쓰카다가 동료를 포기하지 않고 고기를 구해와서 먹인 덕택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기구치는 성공한 샐러리맨이 되었다. 반면에 쓰카다는 전쟁의 트라우마로 망가져 술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그를 살리기 위해 쓰카다가 구해왔던 고기가 죽은 동료 병사의 인육이었던 것이다. 쓰카다는 평생 그 일로 고통받다가 건강을 잃어 결국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됐다. 죽어가던 말년의 쓰카다는 호스피스 병동의 외국인 자원봉사자인 가스통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어느 술주정뱅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데스 산속에서 아르헨티나 비행기가 조난당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한 남자, 타고 있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비행기 안에서도 취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고장 났을 때 그 술주정뱅이는 허리와 가슴을 부딪혀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리고 그 술주정뱅이는 자신을 간호해 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먹을 게 없겠군. 난 이제 죽을 거니까, 내 몸을 다 같이 먹어주게. 싫더라도 그렇게 해줘. 구조대가 올 테니까.

70일 만에 구출된 생존자들은 살아난 뒤에 이렇게 증언했다. 숨을 거둔 자의 몸을 음식으로 삼았노라고. 그러나 누구도 생존자들을 탓하지 않았다. 모두가 무사 귀환을 기뻐했으며 심지어는 죽은 이의 가족들마저도 기뻐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인도의 강을 바라보며 어떤 깨달음에 이른다. '분명히 사람 고기를 먹은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옆사람을 살리고자 자신을 내놓았던 자비로운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환생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요즘 유튜브나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는 처세술이 넘쳐난다. 자기 것을 잘 챙기라고 권유한다. 상대방에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말고, 이상하면 손절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믿으라고 한다. 나 또한 그런 충고를 새겨들은 적이 있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믿었고, 동료들의 미소 뒤에 가려진 거짓을 분간해내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서로의 등을 떠민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의 상처와 괴로움을 서로 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괴로움에 빠졌을 때 곁을 내어주는 존재 역시 사람이다.『깊은 강』을 떠올리면, 나는 상대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