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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영화가 건넨 말, 사람다움을 잃지 마

"지옥에서도 다른 이를 가엽게 여겨라."라고 말하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by 노르키

아빠는 오랫동안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손대는 일마다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다. 수중의 돈을 모아 개업한 가게는 IMF 외환위기를 맞아 빚을 남기고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아빠는 동네 친구의 밀린 핸드폰 요금을 갚아주었다. 빚 독촉 전화가 걸려오면 엄마는 난감해했다. 결국은 엄마가 생활전선에 나섰다. 엄마는 일에 재능을 보였다. 보험회사에서 뻐꾸기시계를 받아왔고, 출판사에서 책을 팔았고, 프라이팬을 팔다가 매출왕이 되기도 했다. 학교 수업료와 학원비, 문제집 값, 생활비가 모두 엄마 주머니에서 나왔다. 어릴 적 학교 교과서엔 ‘땀 흘리는 아버지의 운동화’라는 제목의 그림이 나와있었지만, 나는 그 그림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땀 흘려 고생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러나 나는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릴 적엔 우리 남매에게 썰매와 장난감을 만들어줬다. 생일엔 떡 케이크를 만들어 검은콩으로 내 이름을 새겨 넣던 자상한 아버지였다. 운동회 날엔 새 운동화를 짠! 하고 보여주며 활짝 웃던 아버지. 엄마의 동생들과 몇 년 동안 함께 살면서도 싫은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집에 망해가도 아빠는 우리에게 정직하게 사는 게 가장 편하다고 얘기했다. 세상을 향한 미움이나 분노도 내비치 않았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엄마의 손이 까끌까끌해지면서, 언젠가부터 착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아빠의 말이 공자님 맹자님의 당연하고 고루한 말씀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엄마를 고생시키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빠가 돈을 열심히 벌어왔다면 우리 가족이 지금보다는 덜 힘들게 살지 않았을까? 대학생이 된 내 눈에는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 같았다. 배낭여행, 어학연수, 면접 때 입을 정장. 그런 것들은 모두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몇 년이 흘러 그땐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엄마는 건강을 되찾았고 아버지가 하는 일도 안정을 찾았다. 동생도 나도 직장인이 되었다. 이제야 우린 예전 일을 웃으면서 추억한다. 올해 추석 우리 가족은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도 아빠는 우리에게 “정직하게 살자”라고, “나눠주고 사랑하자”라고,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말자.”라고 했다. 어릴 적엔 그 말이 가장 헛된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해주는 아빠를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게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다른 이를 가엽게 여겨라.

산쇼 다유 2.PNG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산쇼 다유>의 한 장면

일본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가 만든 1954년 영화 <산쇼 다유>를 보고는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원작을 쓴 작가와 영화감독은 어쩌다가 이 어머니와 자녀를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넣었을까? 영화 속 배경은 인신매매가 성행하던 일본 헤이안 시대. 귀족 집안에서 자란 남매 주시오와 안주는 엄마와 여행하던 도중에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엄마와 헤어진다. 남매는 악명 높은 호족 산쇼 집사에게 팔려간다. 그곳은 한 번 팔려 들어가면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수용소나 다름없다. 도망치다가 붙잡힌 노예에겐 이마에 낙인을 새길 뜨거운 인두가 기다린다. 귀족 남매에게도 가혹한 운명이 들이닥친다.


산쇼다유.PNG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산쇼 다유> 중 한 장면

영화 속 남매의 아버지는 노예와 농민을 옹호하다가 중앙 관리의 눈밖에 나 귀양을 떠난다. 떠나기 전 남매에게 당부한다. “동정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A man is not a human being withouth mercy.) 네게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라. (Even if you are hard on yourself, be merciful to others.)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Men are created equal) 모두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Everyone is entitled to their happiness.)” 아버지는 자식에게 인간다움을 잃어선 안 된다고 당부하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소중히 되새긴다.


산쇼 다유 4.PNG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산쇼 다유> 중 한 장면

그러나 아이들이 팔려간 산쇼 집사의 대저택은 노예를 향한 고문과 매질과 강간이 일상인 곳이다. 그곳에 인간다움이란 없다. 오빠인 주시오는 자라면서 동정심과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도망치려는 노예의 이마에 직접 인두로 낙인을 새길만큼 무서운 인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여자 노예가 부르는 노랫말에 자신들의 이름이 있음을 알아차린 여동생 안주는, 엄마가 몸을 파는 노예로 고생하며 살아있음을 알게 된다.


남매의 아버지는 귀양지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여생을 마감했다. 그는 올바른 사람으로 존경받다가 살다가 평온하게 죽었다. 그러나 처자식은 지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다가 몸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착하고 올바른 아버지는 처자식을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으로 몰아넣고는 자기는 평화롭게 말년을 맞이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말자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둘라밤(dulabham)’은 ‘얻기 힘듦’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둘라밤은 ‘인간’을 뜻한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매우 얻기 힘든 기회라고 본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840만 번 환생해야 동물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오는가?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착한 사람이 복을 돌려받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해주지 못한다. 선하게 살았으나 괴로운 일을 겪는 이들, 악한 행동을 하고도 버젓이 부를 누리는 사람들, 그리고 모두들 저마다 자기 안에 선악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얼마 전 우리 아빠는 나를 앉혀두고 말했다. “사랑을 줄 땐 돌려받을 생각 말고 아낌없이 주거라. 사랑하며 사는 게 손해 보는 일 같아? 안 그래. 사랑하면서 살면, 그 사람 본인이 제일 좋은 거야.”


나는 영화 속의 남매를 떠올린다. 그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신을 향한 감사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우린 그렇게 얻기 힘든 기회, 사람으로 태어나는 기회를 얻었다. 이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착한 일의 대가로 복을 주세요.’가 아니라, ‘어떤 괴로움이 오더라도 선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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