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이미 가진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것
며칠 전, 남편과 다투고 홧김에 50일 된 아기를 남편에게 맡겨둔 채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육아와 집안일에 지치고 말았다. 하늘과 땅이 알고 내가 안다는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날이었다. 현실을 잊고 싶어 나왔지만 기껏 간 곳은 동네 슈퍼였다. 나는 가게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올리브유를 충동적으로 집었다. ‘100% 이탈리아산 유기농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얼마 전 식용유가 떨어져 저렴한 해바라기씨유를 고른 것에 대한 보상심리인지도 모른다.
“배달 맡기실래요?”
짙은 화장이 어울리는 카운터 직원의 질문에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집에서 밥도 안 챙겨 먹고 어쩌면 울고 있을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정육 코너로 다시 가서 닭갈비용 냉장닭을 고른 다음에 급히 물었다. "혹시 배달 출발했나요?" 내 말을 들은 직원은 이제 막 출발하려는 배달차를 붙잡았다. 슈퍼 안으로 배달 기사님이 들어와 내게 말했다. ”태워다 줄게요.” 직원도 내게 따라가라는 듯이 손짓하며 말했다. “태워준다고 할 때 타요.” 밖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초면의 차, 초면의 아저씨…. 나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차가 움직였다. 우리 동네에는 고개가 많다. 산이나 다름없는 언덕배기를 올라, 열선이 깔려있는 도로 사이의 주택가를 지나, 담쟁이덩굴과 나무가 울창한 숲 사이를 거쳐, 얌전한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어째선지 편안한 정적이었다. 아빠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좋아하는 우리 아빠는 일부러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국도로 돌아가곤 했다. 어릴 적 아빠 차에선 비지스, 비틀스,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 등이 나왔었다.
"저기 구민회관에서 남편이랑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참가했었어요."
문득 찾아온 따뜻한 기억에 내 마음의 빗장이 풀렸을까? 평소라면 안 했을 말이 술술 나왔다. 기사님이 말했다.
"전국노래자랑이요? 끼가 많은가 보네요."
"원래는 남편 혼자 나가겠다 했는데, 그때 제가 만삭이어서 눈에 띌까 해서 따라 나갔어요."
"그럼 남편이 끼가 많군요."
차에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가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라디오인가 해서 봤더니 CD로 재생되는 오디오였다. 초면의 배달기사님과 나는 좋아하는 음악이 같다… 기사님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짐을 들어주고 내게 건넸다. 배달 기사님의 친절에 가슴이 환해졌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나를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날이 더워서 상의를 벗고 있던 남편의 가슴팍에 자기 주먹으로 퍽퍽 친 빨간 자국이 나있었다. 남편이 미안하다며 내게 말했다. "이젠 안 그럴게. 답답하다고 그러지 않을게." 남편은 프라이팬에 대파와 양파를 넣어 닭갈비를 볶았다.
얼마 전 본 영화 <프렌치 수프>에서 이 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행복이란, 이미 가진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거예요."
남편이 두 아이와 함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찬란하단 사실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