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해야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
이사한 지 엿새 째. 여기 와서 이틀쯤은 매우 좋은 꿈을 꿨다. 아직도 꿈같다. 아침 아홉 시, 머리맡으로 햇볕이 들어와 기분 좋게 일어났다. 서너 달 동안 스무 곳 넘게 발품 팔아 둘러보고 구한 집이다. 처음 이 집을 발견하고, 그날 밤에 남편은 잠도 못 이뤘다. “내일 당장 계약하자. 벌써 집이 나갔으면 어쩌지?” 다음날 아침에 바로 부동산에 연락했다. 곧장 계약금을 넣었다. 그리고 엿새 전인 사월 마지막 주에 여기로 이사 왔다.
집을 볼 때 우리 부부는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하나씩 있었다. 나는 햇볕과 환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편은 거실 창밖 시야가 확 트이기를 바란다. 이 집은 거실과 안방이 남서향이어서 온종일 볕이 든다. 건물 맞은편에는 나무숲과 수녀원, 낮은 주택들이 있다. 그래서 맞은편 아파트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다. 이십 년 된 구축아파트지만, 젊은 집주인 부부가 깔끔하게 수리해 놓았다. 우리 부모님이 사주신 냉장고와, 시가에서 사주신 세탁기와 건조기가 반짝거린다.
주말 아침, 남편이 기분 좋은 얼굴로 거실 창밖을 바라본다. 남편은 대학 입학으로 열아홉에 처음 서울에 왔다. 이번이 남편의 열세 번째 서울 집이다. 기숙사, 친척 집, 옥탑방, 하숙집, 나와 함께 산 투룸… 남편은 감개무량할 것이다. 우린 부모님들의 금전적인 도움 없이 결혼식을 치르고 집을 구했다. 부모님들의 노후자금을 가져다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젠 이전보다 쾌적해진 집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만나게 된다. 처음부터 물질적으로 다 갖춰지거나, 물려받을 게 많아야만 행복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며칠 전까지 살던 낡은 집이 선하다. 우린 대학가 다세대 건물에서 사 년 삼 개월을 살았다. 불편한 집이었다. 남향이긴 했지만, 맞은편 건물과 가깝게 맞닿은 비좁은 투룸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오면 빗물이 천장을 때리는 콸콸 소리가 들렸고, 겨울에는 창문 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들었다. 습기로 곰팡이가 피는데, 동시에 매우 건조하기까지 했다. 물론 집 위치는 참 좋았다. 역세권이었고, 코앞이 대학이라 안전했다. 주변에 각종 생활 시설과 맛집도 많았다.
당시 우리 아랫집에는 집주인이 살았다. 싱크대 배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형광등 퓨즈가 타버려서 연락하면 수리비를 반반씩 부담하자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집주인은 가끔씩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세입자에게 전체 문자를 보냈다. “분리수거 제대로 안 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은 누굽니까? @#$%!&” 이사하기 며칠 전, 나는 집주인아저씨와 유치한 말다툼도 벌였다. 아저씨는 나를 불편해했다. 나도 아저씨를 보면 멈칫했다. 어서 곰팡이가 없는 집, 분리수거함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재작년엔 그 집에서 나와 새 집을 구하려고도 시도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들은 전세가와 매매가가 소름 끼치게 똑같은 신축 빌라만 몇 군데를 보여줬다. 말로만 듣던 ‘깡통 전세’의 위험이 큰 집들이었다. 어떤 날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는 컨설턴트가 우리에게 신축빌라를 보여줬다. 컨설턴트는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의심스럽게도 고급 양복에 비싼 시계를 걸치고 BMW를 끌고 나왔다. 전세 가격이 치솟던 2021년이었다. 요즘 뉴스에서 떠들썩한 전세 사기를 보면서, 집 구하러 다니던 그때가 얼마나 위험한 시기였는지 실감했다.
결국 당시에 살던 집을 이 년 더 연장했다. 당시 생긴 임대차 보호법에 따라 임대인은 전세 보증금을 5% 이상 올릴 수 없어졌다. 우린 임대차 보호법 덕을 본 셈이다. 집주인은 보증금을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괴팍한 집주인이지만 그땐 고마웠다. 덕분에 지금 마음에 드는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됐다.
몸에서 멀어지면 기억이 미화되고 애틋해지나 보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이사인데, 희한하게 예전 집에 무언가를 놓고 온 기분이 든다. ‘소속감’인지도 모른다. 아직 나는 깨끗하고 말끔하고 평화로운 아파트엔 소속감이 없다. 오히려 귀찮은 사람들과 엉겨 붙어살던 다세대 주택에 강렬한 소속감을 느낀다. 소리 지르던 집주인, 밤에 종종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던 앞집 대학생. (우리 집과 앞집 현관 사이는 가까워서, 식탁에 앉아 있으면 노랫소리가 들리곤 했다.) 시끄러운 소리 안 내는 윗집 옥탑방 학생, 공사 소음을 참아줘서 고맙다며 집집마다 초콜릿 한 상자씩 걸어놓은 일층 코인빨래방 사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쏙 빠져나왔나….’
나는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마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동네 애들은 마당 딸린 단독 주택이나 다세대 주택에 살았다. 우리 집은 새로 지어진 빌라였다. 내가 다섯 살 때, 젊었던 부모님이 처음 장만한 ‘내 집’이었다. 여름에 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우리 반의 뚱실뚱실한 남자애가 자기 집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물놀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으엑!” 하며 후다닥 창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평상에 앉아있던 할머니들은 수다를 떨었다. 목줄 없는 강아지들이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열두 살까지 나는 학교 끝나면 학교 애들과 집 앞 놀이터에서 놀기만 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집 옥상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살던 동네가 '빌라촌'이나 '달동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였던 나는 그런 것은 몰랐다. 어린이에게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다. 그저 동네에 같이 놀 친구들이 많았고, 뛰어다닐 공간이 많았으며, 내가 넘어지면 괜찮냐며 걱정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는 것. 그게 떠오른다. 덕분에 열 살까진 고민도 스트레스도 없이 마냥 해맑게 뛰어다니며 놀 수 있었다. 좋든 싫든 그곳에서 우당탕탕 어울려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돈이 더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섣불리 존경하거나 곧장 신뢰하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을 털끝만큼도 낮춰 보지도 않는다. 가난에도 훌륭한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