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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the Reds! 빨개지고 싶은 마음

박완서의 단편소설 『빨갱이 바이러스』를 읽고

by 노르키

국어사전에서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경멸적으로 싸잡아 이르는 말이다. 빨갱이란 단어 뒤에는 으레 ‘소탕’이나 ‘새끼’가 붙는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자만 배척하는 단어는 아니다. 지금도 빨갱이란 단어는 자주 쓰인다. 참사 피해자를 위한 기자회견, 노동조합의 집회, 장애인의 시위, 인권 운동 현장 뉴스 댓글에서 빨갱이란 글자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민주공화국(Republic of Korea)인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빨갱이란 말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뭘까? 불과 수십 년 전엔 언급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던 절멸의 단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빨갱이란 단어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 증오하는 상대를 무력화하는 마법의 낙인이다. 합리적인 설명이나 근거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박완서의 『빨갱이 바이러스』는 우연히 함께 하룻밤을 보낸 여성 넷의 이야기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강원도의 고향 집에서 살고 있다. 화자는 차를 몰다가, 폭우로 버스가 끊긴 정류장에 앉아 있던 여자 셋을 발견한다. 발이 묶인 그들을 집에 데려와 밥을 대접하고 이부자리를 펼쳐준다. 혼자서 속으로 여자들에게 별명도 붙인다. 다리를 저는 여자는 ‘소아마비’, 팔목에 뜸 자국이 있는 여자는 ‘뜸’, 불교 신도들이 입는 옷을 입은 여자는 ‘보살님’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이 풀어진 여자들은 그날 밤 각자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날 밤 여자들이 서로 털어놓은 비밀은 ‘음험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소아마비’는 남편 몰래 여러 남자와 불륜을 맺는다. ‘뜸’은 뇌성마비로 태어난 첫 아이를 시설에 버렸다. 60대인 ‘보살님’은 손자의 젊은 과외 선생과 육체적 접촉을 나누며 설렘을 느꼈다. 그 사이 폭우에 떠내려갔던 손자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만약에 그들의 사연이 뉴스 헤드라인 한 줄로 표현된다면 그들에겐 방탕한 불륜 아내, 비정한 엄마, 망측한 늙은이라는 주홍 글씨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사연을 살펴보면 그들을 욕하기 어렵다. 의처증 남편에게 시달리던 ‘소아마비’는 낯선 남자로부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장애를 얻었다. 그때 얻은 ‘장애’가 정조의 상징으로 승화되며 남편은 의심을 거둬들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때부터 성적 자유를 얻는다. ‘뜸’의 팔에 난 상처는 남편이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다. ‘뜸’의 남편은 뇌성마비였던 자식을 버리자고 종용했으면서도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부인에게 폭력을 저지른다. ‘보살님’은 어떤가?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나이 든 여성에게 수도승 같은 삶을 요구한다. 여성을 성적 쾌락의 주체로 보지도 않거니와 더구나 나이 든 노인 여성이라니. 그녀는 고백한다. “죽은 영감과 아무 문제 없이 아들딸 잘 생산했는데 그게 다 헛산 것처럼 무의미해지더라니까요. 미쳤지요.” 손주의 죽음과 얽히지 않았더라도 이 사회는 그녀가 평생 묻어만 두었던 새롭게 눈뜬 욕망을 품어본다는 것 자체를 용인했을까?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것은 나이 든 여성의 욕망뿐만이 아니다. 젊은 여성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욕망을 감추기를 암암리에 요구당한다. 몇 시간씩 공들여 화장하거나, 대화의 주요 주제가 남자라면, 자존감이 낮아서 남자에게 의존하는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X)’로 조롱당할 수 있다. ‘퐁퐁남’이란 자조적인 멸칭도 유행한다. 부인에게 경제권을 주고 일찍 퇴근해 설거지하는 남편, 또는 결혼 전 연애 경험이 많은 여성과 결혼한 남자를 불쌍하다고 표현하는 신조어다. 여성을 증오하는 신조어들은 바이러스처럼 퍼져,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며 꿈과 욕망을 숨기도록 유도한다.


결혼한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결혼하면 여자는 모성이 넘치는 자애로운 ‘엄마’로 살아가야 한다. 헌신적인 엄마의 규격에서 벗어난다면, “그게 사람이야?”라는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엄마들을 위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언어폭력을 저지르는 남편과의 이혼을 고민하는 만삭의 산모가 있었다. 이런 댓글들이 달려있었다. “아빠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요? 아이에게 죄를 지을 생각이에요?” “때린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엄마에게는 여러 마음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식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도 어딘가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시설에 맡겨버리고 싶은 마음. 각종 의무에서 벗어나 외딴섬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 마음에 드는 남자와 자유롭게 연애하고 싶은 마음. 세상이 ‘음험하다’라거나 ‘그것은 엄마의 도리가 아니’라고 주홍 글씨를 새겨도, 인간으로서 품어볼 수 있는 총천연색의 욕망을 풀어내 보고 싶은 마음의 자리도 있다.


『빨갱이 바이러스』 속의 여성들은 음험하다. 밖에서는 정숙한 아내, 헌신적인 엄마, 인자한 할머니로 살아간다. 하지만 남들 눈이 없는 곳에선 다른 모습으로 산다.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며 여러 남자와 즐겁게 성관계를 갖는다. 장애아이를 시설에 맡기고, 주말마다 그 아이를 돌보는 봉사 활동가로서 잠깐 행복을 누린다. 그들은 여자와 엄마와 할머니를 향한 공동체의 요구에 굴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욕망과 음험함을 밀어붙인다.


그렇다면 소설 속 화자에겐 어떤 비밀이 있을까? 그날 밤 화자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았다. “화려한 과거가 없어서 미안해요.” 사실 화자에겐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과거가 있다. 그녀의 고향 집은 6.25 격전지에 있었다. 며칠 사이에 인민군이 세상이었다가 국군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교양인의 향기를 풍겼던 멋진 삼촌은 졸지에 ‘빨갱이’가 됐다. 고향 집이 휴전선의 남쪽으로 확정되면서, 빨갱이를 가족으로 둔 집안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어느 날 밤 화자는 아빠가 마당에서 삼촌을 삽으로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로 집안에는 이상한 평화로움이 감돌았다. 화자는 자기 안의 음험함을 느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삼촌이지만, 빨갱이가 되어버린 삼촌 때문에 온 가족이 위험에 처했으니, 차라리 삼촌이 죽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화자는 직접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손에 피를 묻힌 적도 없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 그것은 ‘그게 무슨 인간이냐? 동물도 그렇게는 안 한다’라는 말을 들을 법한 상황이다. 물론 화자가 품었던 음험함은 발설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집 앞의 콘크리트 마당과 집 앞의 울산바위는 목격자로서 매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빨갱이를 밀어내는 세상에 굴복한 자기 자신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가 부끄러운 것은 ‘빨갱이 됨’이 아니라 ‘빨갱이’라 불리는 것을 숨기고자 한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뉴스에서 침을 튀기며 아직도 “당신 빨갱이지?”라며 시대착오적인 말을 늘어놓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두렵지 않았다. 또한 수십 년째 빨갱이 담론으로 탁상공론을 벌이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오르지도 않았다. 『빨갱이 바이러스』는 빨갱이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빨갱이라는 주홍 글씨 앞에서 조금 더 빨개지고 싶은 사람들, 무서워도 두려워도 세상이 쳐놓은 경계를 뚫고 조금 더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내게 ‘빨개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켰다. 음험함이란 제거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음험함을 맞닥뜨리고 자기 안의 음험함,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을 욕망과 느낌을 마주하고 펼쳐내는 데에서 자유가 시작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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