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성 <보이지 않는 집> 을 읽고.
독후감을 써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 달 전쯤 지인의 초청으로 모 프로그램에서 짧은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여러 세션으로 강연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는데 마침 저랑 같은 시간대에 있는 다른 강연 주제가 흥미로웠습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건축가의 강연이었는데 그 날 저녁, 다른 분으로부터 그 분과 그 분이 쓴 책에 대한 짧은 소개를 들을 수 있었고 내용이 흥미로워서 바로 책 주문을 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보이지 않는 집> 입니다.
제 독서 영역이 대부분 경제, 경영과 역사에 한정되어 있다보니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 책은 아주 빠른 속도로 완독했습니다. 좋은 책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좋은 책이란 쏙 빠져들어서 금새 읽어내려가는 책이니까요.
책을 읽자마자 든 생각은 '이 사람 천재구나'. 어려운 용어가 가득 박혀있는 긴 문장으로 자신이 전문가임을 뽐내려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작가 혹은 아티스트 백희성은 그런 면에서 분명 전문가입니다. 쉽게 쓰면서도 일반인이 익숙하지 않은 건축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쏙 빠져들게 만드는 필력은 박수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급변을 넘어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힘은 통찰(insight)일진대, 작가는 이 책에 자신의 통찰을 부러울 정도로 유감없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건축이 좋아서 건축가가 된 책 속의 주인공 루미에르 클레제는 자신의 꿈을 이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직장 생활 10년 차. 그 역시 밤낮 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모순에 빠집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할까. '건축사무소에서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아. 고객만을 위한 건축 설계가 아니라 나를 위한 건축을 해봐야지. 평생 남을 위한 건축만 하다가 이렇게 내 인생을 허비하긴 싫어. 건축이 좋아서 이 길에 들어섰지만 정작 나를 위한 건축은 허락되지 않는다니...' 그러면서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파리에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으로 집을 사겠다는 4차원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여행은 시작됩니다.
낡아빠지고 먼지 쌓인 집 한 채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시작된 여행에서 주인공은 건축가인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건축의 개념을 무참히 깨부수는 또 다른 건축가의 철학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건축가의 눈에 너무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좁디 좁은 통로가 사실은 바람이, 새 소리가, 자연이 지나다니는 통로였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통로 혹은 복도,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물길도 길이고 바람 골도 길이다. 세상만물이 지나는 길.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숲 속을 걸을 때도 가끔 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람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 주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고 내가 '개척'해왔다고 생각한 길이 사실은 바람이 지나는 길은 아니었는지. 비행기가 편서풍이라는 바람길을 타고 날듯 나 역시 사실은 잘 나있는 바람길을 탄 덕분에 날고 있는 것은 아닌지.
'4월 15일의 비밀'을 설계한 프랑스와 왈쳐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면서 주인공은 깨닫습니다.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생존과 안락함의 수단으로만 여겼던 집이 사실은 '기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단 난간이 왜 한 쪽은 낮고, 마루 한 곳이 왜 유난히 삐걱거리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작가는 집이란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간과 함께 완성해가는 의미이고 인생이고 철학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거기 사는 사람이 나머지를 추억과 사랑으로 채우고 그때 비로소 건축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죠.
"당신의 집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한 건축가로부터..." 파리에 살던 작가는 길을 지나다가 문득 아름다운 집을 볼 때마다 그 집의 우편함에 편지를 적어 넣었고 간혹 회신이 온 집들로부터 채집한 신비한 스토리들을 모아 이 책을 썼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호기심, 질문과 탐구가 한 개인을 전문가로 만들고 그 전문가의 시각이 다른 사람에게 깊은 통찰을 주면서 이 세상은 발전합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다음 책, 다음 행보가 기대되고 저 역시 누군가에게 통찰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인생의 다른 관점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주변을 통찰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