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전세사기?)
지독한 아홉수의 저주는 삶의 곳곳을 파고든다. 39살 아홉수는 로스쿨행 좌절만으로 끝날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29살의 나에게 그랬듯, 커리어뿐만 아니라 개인 삶에도 아홉수의 저주가 시나브로 다가왔다. 2년을 끝으로 계약 만기 될 전셋집에 계약 종료의사 통보를 했는데 집주인은 답을 주지 않았다. 집 계약은 9월 만기였고 종료 통보는 첫 미국 비자 인터뷰 전 달이었던 4월에 했는데 8월 말이 되도록 답이 없었고 집주인은 나를 피해 다녔다.
사실 이 집은 이사부터 문제가 많았던 집이다. 내 눈에 전세는 조금 이상한 제도다. 월세라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두고 왜 큰 금액을 남의 통장에 넣어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출을 받지 않고 전세금을 모두 마련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보통 그런 경우 집을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게 맞으니 전세에는 대출을 끼게 되기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월세와 전세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크고 넓고 좋은 집이 필요 없는 1인 가구는 더더욱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세로 이사를 한건 "월세 살이"가 주는 우리나라 특유의 부정적인 시선이 한몫했는데, 서른 넘어서까지 월세 사는 한심한 딸내미를 두고 볼 수 없던 모의 성화에 나름 부응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집을 살 생각이 없었고 (미국 로스쿨을 계속 마음속에 품고 살았으니 집을 사서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은 내 인생 계획 저 끄트머리 어디엔가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다) 가볍고 부담 없는 월세살이에 큰 불만이 없었지만 모의 생각은 달랐고, 나이 든 사람 눈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첫 전세살이는 시작부터 삐그덕 거렸다.
건물주는 다세대 주택 건물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는데 목소리 걸걸하고 피지컬 좋은 독거노인이었다. 이사 첫날 찾아왔길래 상투적인 인사를 나눴고, 자기 인생사 좀 이야기하길래 듣고 "아 그러셨구나" 하고 보내드렸다. 새로 산 내 냉장고가 마음에 든다며 어디서 샀냐고 묻길래 쿠팡에서 주문했더니 설치까지 해줬다며 구매 경로도 알려 드렸나 보다. 그게 다였다. 딸이 나랑 한 두 살 차이라고 했는데, 나를 그렇게 극진한 딸 같은 세입자로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자신 명의 카드를 우리 집으로 배송시켰다. 누군가 벨을 눌러서 들어보니 꼭대기층이 여기 두고 가라고 했다며 문을 열라고 했다. "네?" 이건 뭔 시추에이션인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그 당시 나는 완전 재택을 허용해 주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 4회 집에서 근무 중이었다. 순간적 판단에 이상하다 싶어서 받아주기로 한 적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고 인터폰을 끊었다. 잠시 뒤 다시 벨이 울렸고, 카드 배송 직원은 그래도 두고 가라고 했다며 문을 열라고 했다. "집주인이 두고 가라고 했으니 문을 열어라!"는 말이 상당히 강압적으로 들렸다.
집주인이 뭔데? 적당한 금액을 받고 계약서 쓰고 상당기간 동안 자기 소유의 집을 빌려주고 계약이 종료되면 돈을 돌려주면 종료 되는게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다. 도대체 그 이외의 무슨 권력을 휘두르려고 남의 집에 원치 않는 물건을 보내는 걸까? 단호하게 대응했더니 다행히 카드 배달 직원은 조용히 되돌아갔다.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고 원치 않는 벨소리 때문에 두 번이나 끊긴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집주인은 그날 밤늦게 우리 집에 찾아왔다. 인터폰으로 얘기하라고 했지만 문을 열라고 강요했다. 계속 열지 않으니 "아! 저녁이라 옷을 제대로 안 입고 있구나?"라며 재밌다는 듯 허허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안 하고 인터폰을 껐다. 돌아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무섭다.
그 뒤로도 몇 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인터폰을 눌렀다. 단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내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집주인은 트집 잡기로 작전 변경을 했다. 베란다에 내놓은 상자가 마음에 안 든다며 자기 건물에 그런 걸 놓지 말라며 성을 냈다.
집주인의 "아! 저녁이라 옷을 제대로 안 입고 있구나?" 망언 뒤 통창을 가리겠다고 부러 펼쳐두었던 상자였다. 이 상자는 1층을 모방한 가림막이었다(심지어 상자 색도 유사했음). 하지만 집주인은 유독 내 집 상자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기가 고쳐준다고 했다. 나는 내돈내산으로 예쁜 가림막을 사서 가리겠다고 했다. 알아서 설치하겠다는 나와 와서 고쳐 주겠다는 그의 창과 방패 같았던 대화 몇 마디가 오가다 주말 낮 시간으로 구체적인 방문 일시를 잡았다. 해당 시간에 지인을 불러 함께 있을 예정이었다.
너무 뻔한 시나리오지만 그는 환한 대낮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일 저녁 늦게 가림막과 함께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너는 "왜 사람 얼굴을 보고 이야길 하지 않냐"며 울분을 토했다. 끝까지 열어주지 않자 자기 집으로 가 전화를 했다. "딸 같아서 그러는 건데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며 뭐라 뭐라 하더니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무례하게 끊었다.
딸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다음날 나는 통화 녹음본을 들고 근처 파출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