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서 있는 종탑처럼
국토 대장정이 아홉 번째 날에 이르게 되니 어느 정도 루틴이 생기게 되어 조금은 익숙해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거리도 긴 만큼 아내가 싸준 얼굴 보습팩을 붙이고 여정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전날 사 온 빵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05:30분에 숙소 문을 열고 나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정읍 역이다.
걷다 보니 오래된 교회의 종탑이 나온다.
종탑의 부식을 보니 그동안 그 자리에서 꿋꿋이 제 소임을 잘 감당했을 모습이 상상되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나는 아이들이 내 말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화가 난다.
내가 무시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관이 나와 조금 다른 것뿐이었다.
그걸 알기에 조금 더 기다려주고 참아주며 믿어주는 어른(아빠)이 되어 주고 싶지만 내 성정이 올라와 늘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오늘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준 종탑의 부식된 모습을 보니 종탑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종탑
아무리 멀리 있어도 우뚝 솟아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탑
나는 그런 아빠, 아내, 친구, 사람이 되고 싶다.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 길이 끝이 있을까 할 정도로 길게 늘어선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걸으면 그 끝에 다다를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작렬하는 태양 빛 아래에서도 불평과 원망은 할지라도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 글을 보면 늘 상 무서운 개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오늘은 아주 귀여운 녀석이 나타났다.
계속 나를 졸졸 쫓아온다.
너무 귀여워서 멈춰 서서 한 장 남겨 본다.
드디어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신태인역에 도착했다.
쉼의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가는 나날이다.
50분 걷고 10분 정도 쉬면 회복되는 것 같지만 15분 정도만 걸어도 지친다.
그런데 커피 한잔 마시면서 30~40분 정도 충분히 쉬면 다음 50분의 걸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내 삶을 보면 분명 쉬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쉼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들이 나에게 정말 쉼이 되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 쉬는 연습이 필요하다.
잘 쉬면 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이제 채 7일도 안 남은 여정 기간 동안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잘 쉬며 잘 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걸어야겠다.
걷다 보니 아주 익숙한 성이 나와서 잠시 멈춰 섰다.
“인동장씨세천”
나는 인동장씨이다. 그런데 솔직히 인동장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바로 검색해 봤지만 잘 이해가 안 된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나의(우리 집안)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던 나이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하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금은 허름하고 무너진 것 같은 동네 정미소이다.
예전에는 엄청 중요한 마을의 정미소 역할을 했을 것만 같은 곳이다.
세상은 야속하게도 빨리 변화한다.
그 변화의 빠르기에 민감히 반응하지 못하면 한 때의 영광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서 있는 상황을 항상 지켜보아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둘러싼 과거-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한 과거의 영광만 남아 있을 것이다.
점심을 식당에서 먹지 않는 루틴이 자리 잡은 것 같다.
속도 편하고 목적지까지도 쫓기지 않게 도착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며 시간이다.
남들이 다 먹는다고 나까지 꼭 챙겨 먹을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이 평탄하고 큰길이 아니라서 외면하는 좁고 험난한 오르막길이 때로는 옳은 길일 수 있다.
나만의 길을 분별해 가는 훈련의 장이 나에게도 열렸으면 좋겠다.
또한 열린 그 길을 분별하여 참여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은 생각지 않은 기쁨을 더 해준다.
목적지인 정읍역 눈앞에 기정 떡집이 눈에 보인다.
나는 떡 중에 기정떡을 좋아하는 편이다.
밖에서 안을 살펴보니 12개에 5,000원짜리도 판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12개를 구입하려고 했더니 아뿔싸 30개 들이 한 상자만 남았다고 한다.
오후 2시도 안 되었는데 준비한 기정떡이 거의 다 팔린 것을 보면 기정떡 맛집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30개는 먹을 수 없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나를 부른다.
그러더니 안에서 12개를 꺼내 오셔서 그냥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힘내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응원과 감동을 받았다.
정말 감사했고 큰 힘이 되었다.
사장님의 여유 있고 친절한 미소와 배려가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오후 4시인데 너무 일찍 도착했다.
혹시나 해서 프런트에 말씀드려 봤는데 4시에 오라고 해서 주변 카페를 갔다.
다른 숙소 사장님들은 조금 일찍 도착해도 들여보내주셔서 들어갔다.
그것을 생각해 보니 기분이 약간 서운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분 나쁠 것도 없다.
지금까지 다른 숙소 사장님이 편의를 봐주신 것이지 지금 사장님이 나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숙소 바로 옆에 백다방이 있다.
이왕지사 기정떡과 아이스라테를 먹으면서 오늘의 글을 정리해 본다.
숙소에 다시 들어와서 밥집을 찾는데 먹고 싶은 곳은 대부분 2인분 이상 시켜야 가능했다.
그나마 원조감자탕이 평이 좋아서 가보았다.
뼈해장국 한 그릇을 시켰다.
기본 밑반찬이 다 맛있다.
실력 있는 집이란 뜻이다. 특히나 깍두기는 예술이었다.
뼈해장국의 고기는 서울에서 먹던 고기의 질과 비슷하다.
그런데 국물이 완전 내 취향이었다.
아주 흡족한 전라도에서의 한 끼였다.
오늘의 결산(누적 268km)
이동경로: 전북 김제시 세븐 모텔 - 전북 정읍시 정읍역(정읍 골드스테이 모텔)
이동거리: 31km
총비용:69,510원
1)간식: 7,800원(벌크커피,빽다방)
2)저녁: 9,000원(원조감자탕)
3)기타: 8,710원(내일 아침)
4)숙소: 44,000원(정읍 골드스테이 모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