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나
어떤 작가의 책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친구와 여행이다. 좋은 친구와 함께 여행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때는 10월쯤이었다. 먼 곳에 있던 친구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어떻게든 휴가를 맞춰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20대가 선물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만남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그 20대를 함께 보냈던 소중한 친구였다. 30대의 만남은 대부분 비즈니스적이고 필요에 의한 만남일 수밖에 없다. 관계를 배우며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소중한 관계가 존재할거라고 믿었다. 나는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었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관계는 영원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울 것만 같았지만, 그 시월즈음 나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때였다. 일적인 관계, 사적인 관계는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고 두 관계다 노력이 필요했다. 무엇이 중요한가 우선순위를 여길수 없을정도로 두 관계는 다 중요한 관계였다. 지금 하는 일에 빠져서 사적인 관계에 소홀한 것도, 사적인 관계에 빠져서 업무적인 관계에 소홀한 것도 용납할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을 결정했다. 다시는 만날수 없는 20대의 인연이 그리워지는 10월이었다.
짧은 시간에 가야 하는 여행이라, 이미 한번 가본 여행지를 택했다. 일본 오사카. 가깝기도 하고 교통편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거기다 저렴하기까지 하다. 외국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으로 들어온 지 며칠 만에 친구와 나는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다. 사실 이번 여행은 어디를 가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함께인지가 중요한 여행이다. 숙소도 별로 비싸지 않은 곳을 잡았고, 관광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교토였다. 오사카는 전에도 가본적이 있지만, 한국의 경주와 같다는 교토는 처음이었다. 오사카 관광에 끼우기에는 날수가 부족하고, 교토만 가기에는 날수가 남아서 한번도 못갔던 곳이었다. 처음 가보는 곳은 역시 설렘이 있다. 한큐전철을 타고 1시간 가량을 움직여 교토에 도착했다. 아라시야마가 목적지 였다. 검색했던 것처럼 기온거리에서 기모노도 입고 싶고, 철학의 길을 거닐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사람은 많았고, 인력거는 비쌌고, 비도 왔다. 계획대로 되면 여행이 아니지 ...일도 내팽겨치고 시간을 억지로 내서 하는 여행인데 이게뭔가 싶은 나와는 반대로, 처음 오는 일본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없는데도 성큼성큼 나보다 앞서서, 불평하나 없이 앞으로 가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그렇다. 우리에겐 뭔가 대단한 것을 구경하고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함께 일상을 떠나왔고, 함께 생각을 정리하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오늘아니면 다시는 오지 못할 사람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내지는 말자.
직장이 있는 사람은 모두 안다. 일상에서 빠져나온 일년에 몇 안되는 휴가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 교토와 오사카를 정복하고 돌아가리라, 모든 맛집을 체험하고 가리라 결심했던 내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은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분 일초도 아까워서 난리지만, 부유한 사람은 아까워하지 않고 다음 번을 기약하는 여유를 보인다. 돈만 인색한 것이 아니라 시간도 인색하지 않도록 살기 위해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봐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에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자. 이번 여행은 나의 인색함이 조금씩 풀어지는 여행이 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위해 많은 것을 해본 사람은 자신이 그만한 여유를 누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니 여유를 누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많은 것을 한다. 하지만 늘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살았던 사람은 나를 향한 여유가 거추장스럽고 어색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 알게 된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나의 미래와 나의 돈과 나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만큼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확실한 것은 나는 여유가 없었다. 금방 한국에 들어와 한국문물도 잘 모르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자꾸만 멈추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싶었다. 조금은 생각없이 앞으로 나가도 되는데,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많이 고민하다 수없이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주어진 것에 반응속도가 너무 느린 사람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성큼성큼 앞으로 가는 사람이고 싶다. 기회가 오면 오는대로, 준비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지금 나의 일이아닐까 한다. 어쩌면 감상과 비평은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오는 교토는 낭만이 있었다. 대나무숲 사이를 걷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교토의 문화를 경험하기도 하며, 차도 한잔 마시고 천천히 하루를 즐겼다. 무엇을 하든 상관없는 하루였다. 발길닿는대로 앞으로만 갔고, 멈추지도 않았다. 사실 멈출 시간이 없이 다시 한큐전철을 타야했다. 그날 저녁 새로운 호텔에 가면서 치즈케익을 샀다. 오사카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케익. 호텔에서 케익을 조금 잘라먹고나니 너무 많아서 로비의 직원들에게 조금 권했다. 일본과 한국은 문화가 달라서 그런 접대가 통할까 싶었는데, 호텔 직원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의 호의를 받아줬다. 우리에게 따뜻한 일본이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따뜻한 한국이었을까.
가장 마음에 안드는 숙소였는데, 가장 따뜻한 밤이었다.
집에가는 날,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기 위해 마지막 온천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깨끗하고 상쾌한 온천의 열기를 뒤로 하고, 집에가기 위해 정신을 차렸을때, Oh, my god!!!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탑승시각을 착각한 탓에 한국행 비행기가 떠나버린 공항에서 우리는 멈춰서야만 했다. 유심도 다됐고, 돈도 다썼는데 ...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가장 먼저 웃음이 나왔고, 한국에 연락을 해서 휴가가 하루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렇게 하루더 나를 잡아뒀다.
나는 덕분에 하루의 휴가를 더 얻었고, 덕분에 좋은 숙소에서 하루를 더 잘수 있었다. 하루치의 호텔비와 한번의 항공료를 더 지불해야 했지만 말이다. 비용이 더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제야 웃었으니깐. 그날밤이 최고의 밤이 되었으니깐. 한번의 실수는 가끔 최고의 밤을 선물할 때도 있다.
마지막날은 내가 가장 비싼 값을 주고 산 하루였다.
나도 성큼성큼 앞으로 가는 사람이고 싶다. 기회가 오면 오는대로, 준비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지금 나의 일이아닐까 한다. 어쩌면 감상과 비평은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