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기
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나이에 한 공부가 버거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5학기를 달려서 졸업이란 무방비한 책임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상담심리학 공부는 다른 것과 달라서, 하면 할수록 가난해진다. 그런 말이 있단다. 빨리 망하려면 도박을 하고, 천천히 망하려면 심리학을 하라. 명언이다
2년 반은 학비에 학회비에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투자한 나의 석사과정이 끝이 났다. 졸업식 다음 날 나는 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졸업식에서 모두 석사모를 던졌지만 내 마음은 공항에 가기 전 사야 할 수많은 준비물 때문에 조급하기만 했다.
졸업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평생 공부하며 살자 결정했던 나여서, 공부에 끝이 어딨나 하지만 끝까지 해낼 것을 생각지 않고 가야 비로소 끝을 본다. 많은 동기들이 언제 끝나냐를 입에 달고 공부했지만, 나는 끝날 순간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돈도 직업도 없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가 끝날 무렵에 내게 많은 경험과 사람들이 있었다.
공부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와 부딪히며,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가장 큰 공부다.
졸업식 다음 날, 타이항공을 탔다. 지인이 부탁한 짐을 캐리어에 한껏 채워서 과자박스 2박스를 추가로 들고 공항에 갔다. 공항은 언제나 설레는 곳이다. 가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친구를 만나서 함께 하루를 태국에서 경유해 스리랑카로 갈 생각이었다. 출발도 전에 직장에서 벗어난 우리는 자유를 만끽했다. 늘 여행을 갔지만, 이때만큼 기대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이 여행을 정말 기대했다. 서남아시아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오기 위해 우리는 준비만 2주를 했다.
함께 가는 첫 여행
이 친구는 내게 공항에서 뛰라고 했다. 계속 걸으라고도 했다. 모두 일정을 체크하기 바쁜데 시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사진 찍기 바빴다.
이런 친구는 지금껏 처음이다.
늘 서남아시아를 갈 때엔 타이항공을 탔다. 우리는 더 저렴한 항공을 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 멀리까지 여행사의 도움 없이 가기는 처음이라 파일럿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유난스럽게 어떤 비행기를 타야 하냐 물었는데그래도 큰 비행기가 낫다더라.
우리는 두려웠나 보다. 사람은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데 뉴스에서 본 사고 장면만 어찌나 기억나는지, 위험한 상황마다 아찔한 상황마다 두려움을 직면하지만, 사실 뉴스에는 평범한 사람에게 잘 일어나지 않는 전국의 사건 사고 중 하나일 뿐임을 기억한다. 두려음을 이기는데 시간이 걸렸던 우리는 결국 그나마 큰 타이항공을 선택했다. 타이항공은 좌석도 넓은 편이며, 한국인 승무원도 있다. 그리고 각자 모니터도 있어서 오랜 시간 비행할 때 저렴한 가격을 선호하는 편이다. 나는 타고 얼마 후 잠들었는데, 친구는 기내식을 두 번 먹고, 맥주를 세 번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내려서야 들었다. 아깝지 않은 항공료였다.
5시간을 좀 넘게 비행을 하고, 태국 수안나폼 공항에 도착했다. 일 때문에 많이 와본 곳이고, 태국 여행도 한번 했던 터라 반가운 공항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항 안에 손꼽이는 태국 공항은 하루 2만 보는 기본으로 걸어 다닐 수 있다. 태국은 택시비가 싸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유심을 끼우고, 택시를 타러 갔다. 고작 하루 경유지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했다. 호텔 조식과 수영과, 마사지. 23시간 50분 안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목표를 이루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기대와 두려움을 넘어선 흥분이 호텔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새벽에 도착해서 일찍 잠을 이룰 수 없었으니 말이다. 호텔은 너무 비싸지 않지만, 마사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23시간 50분의 태국여행은 시작되었다.
(보통 항공사들은 공항세를 내지 않기 위해 24시간이 좀 안되도록 경유 일정을 잡는다. 태국은 공항세를 안 내고 관광을 하고 돌아와도 상관이 없다. 물론 항공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나,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23시간 이상 경유로 항공일정을 잡았다. )
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얼굴이 아니라 글자로 해주는 환영에도 뛸 듯이 기뻐한다. 돈을 내면 내 이름 석자는 물론 나의 어떤 것을 사용해서라도 나를 환영해준다.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기뻐하며 흥분해했다.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이곳은 호텔과 마사지의 천국이다. 23시간 50분밖에 자본주의를 누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침에는 조식이 필수, 먹고 나서는 수영장에서 운동, 운동 후 사진 촬영은 덤, 예약해놓은 마사지를 마치고, 방콕의 유명한 야시장을 방문하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 이 빡빡한 일정이 왜 계속 소화가 되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일을 더 주는 상사 때문에 매번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안 되는 데 말이다. 내 위장의 문제는 아니라고 믿는다.
새벽 2시가 넘어서 잠들었지만, 8시에 상쾌하게 눈이 떠지는 건 왜일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아끼기로 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오늘의 시간은 아껴야 한다. 돈보다 시간이 중요한 하루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음식을 여러 개 먹을 수 있는 호텔 조식이 끝나면 수영장으로 향한다. 이곳 수영장은 작지만 통유리로 되어있어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날씨도 너무 좋은 것이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들어가고 싶은 날씨다.
여행을 할 때는 항상 오래된 운동화를 신는다. 처음 여행에서 새 옷과 새운 동화를 신고 돌아다녀보면 발뒤꿈치가 까져서 오래 걷지를 못한다. 그래서 새운 동화는 나의 여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행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춰야 한다.
내가 태국에서 멈춘 이유이다. 목적지는 스리랑카다. 하지만 태국에서 멈추고 싶었다.
그걸 도와주는 데는 헌 운동화가 적격이다. 이번에도 나는 이 운동화를 신고 엄청나게 많이 걸었다. 나는 하루 종일 걷고 나서 하얀 호텔 이불속에 들어가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의 피곤과 여행의 피곤은 같은 단어이나 뜻이 다른다. 일상의 피곤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피곤이나, 여행의 피곤은 아침이 되면 말끔하게 사라질 것 같은 피곤이다. 직장인이 늘 피곤한 이유를 아는가. 피곤은 업무의 양보다 그 업무가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 같은 불길함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하루 만에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서로 질문했지만, 그 어려운 걸 다 해냈다.
여기서만큼은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부인할 수가 없다.
어느새 우리는 이 유명한 야시장에 와있었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고, 시장의 불빛은 찬란했다. 무엇을 찍어도 예쁘게 나왔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었다. 비가 살짝 오는 날씨였지만, 덥지 않아 더 좋은 건 우리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타국에 가면 꼭 시장을 가본다. 관광지 시장이든, 동네 시장이든, 그 사람들의 표정과 음식을 보면 그 나라에 대한 인상이 남는다. 태국은 조금 특이한 것이 이전엔 집집마다 부엌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밖에서 사 먹는 것이 더 싸고 맛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많은 지역은 그래서 딜리버리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먹을 것이 다양하고 싸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해서 태국을 좋아했나 보다.
23시간 50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짧지도 않았다. 찰나를 즐기는 것만큼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내가 가야 할 여행은 6박 7일이었다. 23시간 50분은 그중에 찰나에 불과하나 나는 찰나를 즐기는 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경유 일정은 정말 완벽했다. 매일 같은 일정 속에서 찰나의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끔은 찰나의 행복이 우리가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지속적인 일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안고 사는 것 같은 이 시대에 나는 오늘도 짧은 찰나를 선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