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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Aug 03. 2018

편하다는 의미의 그늘

이미 가졌기에 잘 보이지 않는,

@momo


“방금 메일 보낸 거 프린트 좀 해주세요.”


네에-! 크게 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벌써 몇 번을 요구받은 이야기들. 프린트, 파일 정리, 팩스 보내기.... 자기 대신 누구에게 연락해서 뭐를 물어보라는 둥, 만날 약속을 잡아 달라는 둥, 별의별 일을 다 시킨다. 한 마디로 자잘하고 의미 없는 일들. 전부 자기가 하기 귀찮으니까 시키는 일들이었다.     


렇게 산 지도 벌써 4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구구절절이 과정을 얘기하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상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씩 했다. 귀찮게. 나를 바보라고 여기는 건가? 뭐, 어때? 어차피 이건 내 일이 아닌데. 뭐든지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전까지 애정이 느껴지지 않 못난 일일 뿐이다.




“내년에 최저 임금이 8,350원이 된대요.”     


인터넷 뉴스에 뜬 기사 내용을 읊었다. 핸드폰을 만지며 밥이 나오길 기다리던 상사는 그건 영세업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정책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고용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오히려 일자리가 없어지고 경제가 더 나빠질 거란다. 단지 임금이 인상되는 것만 보고 좋아하는 건 1차원적으로만 해석해서 나오는 반응일 뿐이라는 거였다. 내가 기사를 보고 마냥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상사의 해석이 1차원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장님은 영세자니까 영세업의 시각에서 말하고 있는 거라고. 게다가 그가 말한 건 새로운 관점에서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미 신문에서 매일 떠들고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난 별  없었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 시급이 오르면 내 보잘것없는 노동에도 가치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말었는데.


꽃이 아름답다는 건 누구나 느낄 수 있어.


점심 이후에도 상사의 자잘한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오늘도 날씨는 역시나 더웠다. 찜통 같은 날씨에 컴퓨터도 먹통이 되었나 보다. PC방에서 일했으면 30분 만에 다 처리할 일이 한 시간이 지나도 쌓여 있었다. 긴장감도, 집중력도 쉽게 늘어졌다. 그동안 누가 물어보면 일이 편하다고 해왔다. 일에 아무 책임도, 보람도,  느끼지 않아도 되어서. 편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나를 부러했다.      




처음에는 편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완전히 쉬는 것도, 온전히 내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함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었다. 편하다는 의미의 그늘 아래서 그 이상으로 특별하게 다가오는 의미는 없었으니까. 편함에 익숙해질수록 그 이상의 가치는 느껴지지 않았다. 더한 의미를 갈망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내 존재가 조금씩 초라해져 갔다.


그 의미란 건 어떤 것일까. 어쩌면 그건 불편할 만큼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일지도 모른다. 일은 그저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일 뿐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다. 그 '의미'란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도 잘 알지 못한 채. 결국 무슨 일을 하든 그저, 오늘 내게 허락된 행복을 볼 수만 있으면 괜찮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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