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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Nov 06. 2018

내 삶의 기생충

왜 끝없이 벌어도 항상 돈이 없을까


“관리 받으셔야죠. 피부가 얼마나 큰 스펙인데요.”

“배움에 돈을 아끼지 마세요.”

“스트레스받을 땐 먹어줘야죠.”


쪽쪽 빨았다. 이번에는 더 세게, 그리고 오래. 이제 내 삶에 번식하는 기생충은 어떻게 해야 나를 통제하는지 잘 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기생충이 나를 구슬렸다는 걸 알면서 또 당했다. 카드를 건네받은 직원은 자신의 입담이 좋아서 고객 한 명을 더 늘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띵동. 120만 원이 결제되었다. 숨을 쉬기 힘들다. 감당 못할 만큼 비대해진 기생충 때문에. 기생충을 굶겨 없애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녀석에게 또다시 현금을 먹이고 말았다.


도움이 필요했다. 은행은 단 몇 분 만에 상황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리볼빙. 그 순간, 이 달치 먹이로 300만 원을 부르던 기생충은 30만 원으로 바로 말을 바꿨다. 휴우우. 조금 살 것 같았다. 은행은 이 상황을 잠시 유연하게 만들어준 대가로 연이율 21%라는 수수료를 챙겼다. 달력을 펼쳤다. 붉은 글씨로 적힌 날이 눈에 들어왔다. 토, 일, 월. 1월 1일 월요일이 붉은 날이다. 중견 기업도 안 되는 회사를 다니는 내가 평일에 쉴 수 있는 날은 추석과 설날 외에는 흔치 않았다. 붉은 글씨는 꽤나 유혹적이었다.


줄여도 줄여도 줄지 않는 이 웬수


신용카드를 만들었던 게 잘못이었을까. 신용카드 통제력을 언제부턴가 놓쳐버린 게 잘못이었을까. 혜택을 누리려고 만든 신용카드는 기생충이 사는 집이 되어버렸다. 기생충이 살게 된 이후 머릿속 구석구석이 점점 가려워졌다. 답답했다. 도망가고 싶다. 머릿속을 꽉 틀어쥔 답답함 사이로 연말이니까, 여행을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결국 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카드를 긁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의 답답함은 더 많은 돈을 쓰고 싶다는 또 다른 욕구를 불러왔다.




살이 찔수록 더 먹고 싶어 지듯이, 돈은 쓸수록 더 쓰고 싶어 진다. 아니, 돈을 써서 내 안의 사라진 뭔가가 돌아오길 바랐던 것 같다. 추운 연말에 따뜻한 괌으로 여행 갈 생각에 들떠야 했지만,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에 달린 추는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충만감은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 같았다. 현금을 쓰면서 느낄 수 있는 충만감은 현금과 함께 기생충이 먹어버렸다.


기생충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저녁 시간과 주말, 개인 시간을 담보로 더 많은 일을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생충은 더욱 혈기왕성해졌다. 은행에서 처방해준 약은 별 효과가 없었다. 어느 약이 그러하듯이, 상황이 악화되는 게 잠시 늦어졌을 뿐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비 습관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카드를 더 긁게 되었다. 현금은 죄다 기생충의 먹이로 들어갔고 본질적인 퇴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기생충은 두 배로 늘어났다. 약 처방의 대가로 은행이 매달 받아가는 수수료가 이에 한몫을 했다. "돈을 쓰지 말라"는 강박관념이 커지는 만큼 소비의 고통은 깊어져 갔다. 어느 고통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기생충이 생긴 건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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