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혜인 Nov 12. 2018

마음에 시간이 흐른다

떠날 때는 언제나,


퇴사하겠습니다, 몇 번이고 되뇌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말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던 대표는 그 말을 들은 이후에도 입가에 띤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내가 싫어서 그래? 대표의 질문에 아니라는, 당연한 대답이 튀어나갔다. 대표도 내심 놀랐나 보다. 2년 동안 군말 없이 일해왔던 직원이 갑자기 퇴사하겠다고 하니까. 그 순간 대표가 할 수 있는 말은 몇 없었을 것이다. 아이고. 어떡하냐, 대표가 지은 말의 한숨이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대표가 조금씩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전보다 업무 지시 카톡을 많이 보낸다. 어찌 보면 짜증을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이거 했어요? 저건 왜 아직 안 됐나요? 그건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퇴사를 말하면서 대표에게 한 달 뒤에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평소였다면 빨랐을 한 달이, 느리게 흘러간다. 사실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되려 전보다 많아진 대표의 카톡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는 거였다. 대표가 묻는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조금씩 뒷 시간으로 밀려났다. 화면에 처리해야 할 업무를 띄우면 그 순간 정신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퇴사하겠다’라는 말은 마치 멈춰있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찰나의 순간 같았다. 마음은 시간을 타고 조금씩 더 멀리 흘렀다. 시계가 움직이면서 대표는 평소보다 자주 사무실에 나왔다. 평소였다면 5시에 퇴근했을 대표는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을 때까지 회사에 머물렀다. 조용한 정적의 순간이 계속되면서 허공을 가르는 키보드 소리는 커져갔다. 대표님, 이 건은 처리가 됐습니다, 저 건은 진행 중이고요, 그 건은 아직 고객에게서 연락이 없어 보류 중입니다.


잠시간 조용하던 대표에게서 잔뜩 격양된 어조의 카톡이 날아왔다. 고객이 보낸 서류를 확인 안 하면 어떡해요? 어서 확인하세요. 메일함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띄웠다. 하얀 화면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지면 낡은 컴퓨터는 언제나 여유를 갖기를 강요했다. 드디어 화면이 바뀌었다. 오늘, 어제, 그저께.... 날짜가 줄어들고 페이지가 넘어갔지만 고객이 보냈다는 서류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객이 대표에게 '대리님에게 서류 보냈는데 아직 확인을 안 한 것 같다'라고,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디에 서류를 보냈다는 것이지요, 내 카톡을 확인하고도 고객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몇 분 후 받은 대답은, 아, 대리님. 지금 확인해봤는데 예전에 처리가 된 건이네요. 죄송합니다, 였다. 고객의 말을 전하며,


대표님, 이 고객이 헷갈리신 것 같은데요. 예전에 다 처리가 된 건이라고 하네요, 평소보다 강한 키보드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메시지 옆에 붙은 1은 금방 사라졌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그 의미는 다르지.


누구나 같은 시간의 하루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때에 따라 다르게 흐르나보다. 빠르게 흐르던 시간은 대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금씩 느려졌다. 어제처럼, 해야 할  리스트가 카톡으로 날아왔다. 카톡 창을 펼쳐놓고 메일함을 연다. 스크롤을 올려 어제, 그저께, 대표와 나눈 카톡을 읽어보았다.


하세요.

네.

했어요.

네.


최근 오간 무미건조한 말들이, 지난 몇 달을 합친 그 어떤 말보다 훨씬 많았다.


네가 없을 날들이 조금 걱정된다.

죄송해요.

오늘, 카톡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미안해.


그런 말들이 오갔더라면 어땠을까.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누구보다도 진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 어제만큼 경직된 하루가 흐르는 시간을 뚫고 다시 흐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