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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Nov 19. 2018

하나의 시작, 두 개의 이별

가까운 타인의 타이밍


"우리, 사귀기로 했어."


한참의 침묵 끝에 네가 말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 그랬어? 하하하, 이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호탕하게 웃었다. 며칠 전, 그와 둘이서 술을 마셨었다. 그때 그는 네가 그냥 친구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냥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그와 사귄다고 한다. 순간, 멍해졌다. 너와 그의 관계가 바뀌면서 우리 셋의 관계도 바뀌었다.


네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쿵, 뭔가 강하게 심장을 쳤다. 축하해줘야 하는데. 그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점심은 같이 못 먹을 것 같다는 말이 대신 나갔다. 일이 있다고. 방이 지저분했다. 정리해야겠다. 당장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옷, 겹겹이 쌓아놓았는데 제 무게에 못 이겨 쓰러진 책, 책상 위에 흐트러져 펼쳐진 펜. 텅 빈 연필꽂이. 원래 자리로 하나씩 옮겼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에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쌍의 남녀가 기숙사 밖으로 나간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뒷모습. 둘의 모습이 천천히,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뒤를 쫓았다.




연락을 기다렸다. 커피 대신 좁은 방의 답답한 공기를 마신다. 과제는 어렵지 않다. 수업 때 적은 노트를 훑고 몇 페이지에 걸친 문제를 풀면 금방 끝낼 수 있으니까. 두어 시간이 지나갔다. 이보다 어려운 과제는 앞으로 잠들 때까지 뭐라도 해서 시간을 채우는 일이다. 며칠 뒤면 잊힐 인터넷 기사 클릭질을 몇 번 했다. 드라마도 보았다. 서너 시간이 지나갔다. 저녁 7시. 밥 먹으러 갈 시간이다.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반짝이는 귀걸이를 끼고 코랄 립스틱을 바른다. 아이라이너도 진하게 그린다. 머리는 묶을까 풀까. 타이트한 치마가 어색하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 그가 생각났다. 너보다 예쁘고 싶다. 버스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아직 아무도 없다. 그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문이 열렸다. 그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앉는다.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괜히 치마를 움켜쥐었다. 왜 이제 와서 내가 이러는 걸까. 그 어색한 순간은 다른 사람들과 네가 들어왔을 때 끝이 났다. 너는 그 옆이 아닌 내 옆에 앉았다. 벌어진 우리 셋의 관계를 모으려는 듯이.


인연도 저 물줄기의 타이밍 같을까.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그에게 가 있었다. 칠판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옆모습이, 평소와 달리 불편함이 에워쌌던 아까 그 찰나의 순간이, 낯설다. 그는 왜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나와의 시간을 찢으면서까지 너와의 시간이 좋았던 걸까. 그를 남자로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지금에서야 드는 이 기괴한 감정이, 낯설다. 나는 왜 친구의 시작에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하는 걸까. 그는 무언가 열심히 노트에 받아 적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이 가득 채웠다. 아, 이제 단둘이 술을 마시지 못하겠구나. 며칠 전 그때가, 둘이 나눌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구나. 나도 그를.... 좋아했구나.




누군가에게는 시작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네가 말을 걸었다. 그와 다운타운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오후 2시. 밝은 햇볕으로 따뜻한 거리를 셋이 함께 걸었다. 오랜만이고도 처음인 순간. 둘의 맞잡은 손을 보았지만 보지 않은 척했다. 그를 보면서 환히 웃는 네가 예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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