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사이 많이 변했지만 꽤 많은 것들이 그대로다
십년만에 다시 찾아 온 캄보디아는 꽤 많은 것들이 놀랄만치 그대로다. 프놈펜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고, 시엠립에는 버젓한 빌라들이 많이 생겼지만 여전히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는 가족들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다만 십년 전 새로 지어 깨끗하던 집에는 이제 시집간 세 딸의가족까지 들어와 무려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고,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모두들 퇴근하고 엄마가 준비해준 저녁 식사를 먹고 나면 다같이 거실에 모여 앉아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웃고,따로 때론 모두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한다. 한창 개구진 나이일 때 보았던동생 하나는 이제는 어엿한 건축학도가 되어서 졸업을 하면 건축 사무소를 차리겠다는 이야기를 맥주 한캔을 비우면서 한다. 새삼 흘러간 시간을 실감한다.
어제는 첫출근을 했다. 오늘 아침엔 HIV 전문가인 매니저에게 한 시간동안 캄보디아의HIV와 세계보건기구의 관련 프로그램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프린트 하나 없이백지장 두 장에 그림과 그래프를 그려가며 깔끔하게 설명을 해주고는 좀 더 알고 싶으면 참조하라며 열댓개의 파일을 보내어주었는데 한시간의 간단한설명이 알고보니 거의 700페이지에 걸쳐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회사나WHO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오랜만에 사무실 의자에 앉아 HIV에 관한 자료들을 몇 시간씩 읽고 있자니 에이즈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내가 이렇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읽고 있는 자료들이 헤드카운트 컷이 아니라 HIV 진단과 치료에 관한 것이라 생각하니 괜시리 설레었다.
캄보디아는1995년 이후 계속 6퍼센트가 넘는 GDP 성장을 하고 있다. 이 여세를 몰아가면 곧 월드뱅크 기준의 “저소득 국가”에서 “중저소득 국가”로 분류가 상향 조절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도시의 경우 오르는 물가를 사람들의 월급이따라잡지 못하여 엘리트 및 중산층들도 2개 이상의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다. 나랑 같이 사는 식구들은 캄보디아의 중산층 중에서도 교육 수준이나 경제력이 상위에 해당하는 것 같지만 개중에서도 하루에 2개 이상의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2명이나 있다. 캄보디아의 의사들 역시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의료시설에 근무하는 의사 중 절반 이상이 사설 병원에서도 동시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1980년도 출생 기준 기대수명은 평균 29.6살이었다. 웬만큼 못 사는 아프리카 최하위층 국가에서도 요즘 기대수명이 36살은 넘어가는 것에 빗대어 보면 저건 정말 충격적인 숫자다. 내가 1980년도에 태어난 아기였다면 30살이 넘으면 우리네 팔순처럼 잔치라도 해야 할 판인 것이다. 퇴근길에 같이 사는 언니에게 물어봤더니 바로 직전 년도까지 있었던 캄보디아 공산당 통치기인 크메르 루즈(Khmer Rouges)시대에 인구의 ¼이 학살되었던 것이 통계적으로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그 당시에는 워낙 땅에 지뢰가 많아서 걸어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했다. 지금의 캄보디아 기대수명은 60살이 훌쩍 넘지만, 여전히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평균 기대수명이 80을 넘는 장수국가에 비하면 채워야 할 빈틈이 많다.
이번 주는 바로 옆 블록에 근무하는 언니네 부부의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을하고 있지만 당장 다음 주부터는 일의 특성상 지방 출장이 많은 언니네의 도움 없이 혼자 출퇴근을 해야 하게 생겼다. 프놈펜은 아주 최근에 일부 구역에만 도입된 버스를 제외하고는 대중 교통이 없다. 오토바이에사람이 앉을 수 있는 수레를 매달아 놓은 뚝뚝(Tuk Tuk)과, 좀더 저렴하게 오토바이 운전하는 사람의 뒷좌석에 타는 모터택시가 있지만 내가 사는 집은 강을 건너 와야 하기 때문에 교통비가 꽤 많이 든다. 빗대어 말하자면 분당쯤에서 한남동까지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느낌과 비슷한데, 물론 비싸봤자 한달에 교통비가 이삼십만원 나가는 것이지만 한푼 한푼이 소중한 무급 인턴에게는 과한 사치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남는 오토바이로 단기 집중 트레이닝을 받기로 했다. 작은 스쿠터야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침 저녁 출퇴근길의 무질서한 교통 체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이 집 여자들은 모두 오토바이를 타고 등하교를 하며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도 오토바이로 출퇴근을하지만 한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읽었던 WHO 보고서에서는 최근 5년 사이 캄보디아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30%가 넘게 증가했고, 교통사고 사망자의 66% 이상이 오토바이운전자라고 했다.
3. 휴일이 너무 많다. 계획은 하나도 없다.까짓 거 죽지만 않으면 되겠지 싶었는데. 하지만 지금 나에게 오토바이는 선택이 아니라필수다. 다음 주를 생각하니 심장이 쫄깃해진다.
그리고 여긴 너무 덥다. 가져온 립스틱이 녹아 내리고, 화장실에 놓아둔 치약은 늘 따뜻하여 기존 치약이 선사하는 청량감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바람 잘 드는 꼭대기 층에서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여전히 더위에 잠을 설치고, 낮 기온은 매일 40도에 육박하여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가 오분을 채 못 걸어도 온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난다. 여기서 세 달을 버텨내면 맥반석 사우나 안에서 크로스핏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은 더위에, 머리는 새로운 일에 천천히 적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