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 대상도 모를.
야속하다 [野 들 야 / 俗 풍속 속]
: 무정한 행동이나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섭섭하게 여겨져 언짢음.
20대 후반에 자궁내막증 증상으로 큰 종합병원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난임이 될 수도 있는 병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그런 수술을 받게 됐다는 것에 온 가족이 날 안쓰러워했다. 자궁 내에 기관이 유착되어 개복을 해봐야 알겠다고 했었고, 젊은 여자의 배에 흉이 생기지 않도록 의사 선생님은 배꼽 한 곳과 근처 세 곳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카메라와 장비를 넣어 수술하는 복강경수술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후 6년간 호르몬 치료를 하기 위해 약을 먹었다. 약은 단순했다. 여성호르몬이 나오지 않게, 그러니까 생리를 하지 않게 하는 피임약이었다. 그 피임약을 오랫동안 복용하면 유방 관련 질환의 위험이 높아진다.
간과했다. 몇 년 전, 결혼하기 한참 전 초음파를 해보고 이후 관심 없이 살았다. 알고 있었는데 미뤘다. 큰 일 없이 아기도 낳았고, 길지 않았지만 모유수유도 했다. 그래, 끊임없는 부부싸움으로 스트레스는 받았겠으나 그게 이렇게 몸으로 표현될 줄 몰랐다.
왜 생겼을까.
원인은 그렇게 크게 두 가지였을 터였다. 아니, 더 찾아보자면, 유전적으로 빨리 찾아온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주기적으로 했던 염색도 떠올랐다. 염색을 자주 하는 여성에게는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기사를 봤음에도 그냥 수치적인 거라 생각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스트레스 푼다고 먹던 생라면이나 늘 즐기던 과자와 디저트, 음료수, 그런 주전부리 때문일지도.
‘나 착하게 살진 않았어도, 그렇게 못 되게 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무슨 벌을 받는 걸까?’ 화살표가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 친구 T는 그런 자책은 할 필요가 없다며 그 생각은 냉큼 접으라고 했다.
제때 검사를 받지 않은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나 지난 얼마간 내게 절대적인 스트레스를 던져 준 그를 원망할 시간이 없다. 나에게, 나의 치료에, 온전히,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는 당장 내 아이의 응가를 치워야 하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아니, 다시 다시!)
‘응가를 스스로 치우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둔’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초등학생을 키우시는 막내 외숙모도, 임신 중인 동생도, 걱정 마라 엄마아빠가 다 본다는 부모님도,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이지만, 내 아이의 응가는 힘들어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들께 죄송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엉덩이를 맡기는 게 어색할 우래기에게도 미안하고 그렇다. 그래서 아파도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난 후에 아팠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속함. 누구를 향한 감정인지 모르겠으나 내내 그런 마음이 맴돌았다.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서, 내 새끼가 아니라서, 그게 나라서 다행인데, 그건 알겠는데…
‘아! 지금은 아니지 않나요? … 거,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하늘 어딘가에 계시다는 신에게 괜스레 소리쳐봤다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 금방 사과드리고서 그다음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 나 금방 데려가려는 거 아니죠? 가는 데 순서없다지만, 이제 막 애 돌 지났는데!! 아 좀 빠르잖아요!‘
…아, 이것도 소용없어, 부질없어, 쓸데없어.
신의 영역이다. 누구 탓을 한다한들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낭비하지 말자.
23.07.20. 늦은 새벽.
끊임없이 글을 쓴다. 생각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