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디 UnD Apr 14. 2024

그렇게 나는 통대생이 되었다

통번역대학원 1학년 1학기의 시작

"모두 환영합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한번 해볼까요?"


수업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자기소개라니. 수년간 회사 이름, 회사의 직무로만 채워졌던 정체성 그밖에 나에게 무엇이 남아있는지를 자문하게 되는 철학적인 요청이었다. '자기'는 무엇이며, '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머릿 속이 멍청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첫 타자가 간단하게 자신의 전공, 최근까지 무엇을 했는지, 영어 관련 경험 등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말을 마쳤다. 긴장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 모두의 심장을 3배 더 뛰게 만든 것은 교수님의 그 다음 지시였다.


"이제 옆 사람이 방금 말씀하신 분 자기소개 내용을 통역해 보시죠."

"?!!!"

='아니,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바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 통역을 시켜 버린다고?'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지만 피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한명 한명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고, 옆에 앉은 사람은 연이어 통역을 했다. 그 중 누군가는 조금 더 능숙하게, 누군가는 더듬더듬, 언급된 내용을 영어 문장으로 옮겨 뽑아냈다. 다행스럽게도 평가가 이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추측컨대 교수님이 전반적인 영어 발화 수준을 확인해 보고자 하셨던 것 같고, 배경지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빠르게 언어 전환을 해야야 하는 통역사의 자질에 대해서 알려주시려는 의도인 것 같기도 했다.


통역을 시킨 건 앞서 언급한 수업이 유일했지만, 개강 첫주 일주일 내내 수업시간에는 말과 글로 자기소개하기를 요청받았다. 이름과 학부 때 전공, 지금까지 해온 일, 해외 거주 경험, 영어 고민 등 자기소개의 기본 틀은 있었기 때문에 점차 긴장은 낮아졌지만, 반복적으로 자기소개를 하다보니 괜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흥미로운건 같은 자기소개이지만 점점 자연스럽게 내용이 수정되고 발전해나갔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군더더기 말은 사라지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해야될지 감이 잡히기도 했다. 결국 자기소개도 청자에게 필요한 내용, 청자가 흥미롭게 들을 내용을 구성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한영 전공의 경우 10명 내외의 사람들로 반을 구성해주는데 1학기에는 반별로 수업이 배정되기 때문에 반 사람들과 모든 수업을 함께하게 된다. 원래부터 사람들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수업에서 강제된 자기소개 시간이 꽤나 즐겁게 느껴졌다. 물론 자기소개를 한다고 해서 사람의 내면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입으로 말하는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하다고 믿기 때문에 다소 반복적이었지만 흥미롭게 다가왔다.


통대 수업은 통역, 번역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AB(한국어에서 영어로 변환), BA(영어에서 한국어로 변환)를 포함하고 있다. 1주차에 통역 수업은 통역 전반에 대한 개관 및 '노트테이킹'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노트테이킹은 통역사가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기록하는 메모 방법인데, 일반적인 필기나 기록과는 성격이 다르고 통역 목적으로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라 꽤나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잘 활용할 수 있다. 최근에 유퀴즈에서 티모시 샬라메와 젠데이아 출연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분들이 다시 프로그램에 섭외되면서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거기에서도 노트테이킹이 언급되었고, 또 그외 여러 온라인 콘텐츠에서 노트테이킹이 조금씩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노트테이킹 예시: 모범 사례 아님

번역 수업은 특별한 설명 없이 바로 번역 실습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번역 작업은 대부분은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데, 첫 주차이다 보니 개인노트북을 준비 못한 사람들도 있어 번역 내용을 종이에 써서 적어 내고 학생들 간에 무작위로 나누어 받아 각자 평가하는 식이었다. 한영 번역 수업은 경제 분야-수출입 동향, 영한 번역 수업은 정치 분야-한미 동맹과 관련한 텍스트였다. 참고로 나는 정치 경제에 문외한인데다가, 워낙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 텍스트의 내용이 외계어처럼 느껴졌다.(이후 이런 나의 성향은 강제 개조되기 시작한다.) 구조나 어휘가 어느정도 정해져있는 딱딱한 글을 한번도 번역해본 적이 없어 너무도 생소했다. 꾸역꾸역 쏟아지는 과제들을 해가며 통대 1학기 첫주차가 긴장과 피로로 훌렁 지나갔다.









 

이전 05화 회사는 나의 여지를 살해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