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디 UnD Apr 07. 2024

회사는 나의 여지를 살해했다

회사가 다 그렇지 뭐, 그쵸?

[이전 화]


합격증을 받아 들었지만, 나는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1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전과 다른 직무를 맡게 된 것을 제외하고 직장인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했고, 회색 박스 속에서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은 느낄 새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롭게 맡은 프로젝트에는 딴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일이 쏟아졌다. 늘 그래왔듯이, 언제 들어버린지 모른 버릇처럼 나는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었고,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잘하는 일로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느끼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무엇보다도 외국계 회사와의 협업을 위해서 가용한 모든 아침 시간을 미국 시차에 맞췄다. 엄연히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일이 돌아가니까. 돌아가는 일을 멈춰버릴 순 없으니까. 물론  누구도 이런 헌신을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팀 사람들은 숙명을 받아들인 자들처럼 모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설렘과 두려움 속에 어느 누구도 정답을 바로 도출해 내기 힘든 진취적인 고난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봄 꽃이 질 무렵, 첫 해외 출장을 갔다. 현지 공항에 떨어져 숨돌릴틈 없이 캐리어까지 든 채로 곧바로 협력사 오피스로 향했다. 뜨끈한 샤워는 언감생심이었고, 12시간 이상 비행한 꼬질꼬질한 상태로 도착하자마자 바로 협력사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회의에 투입됐다. 현지 일정이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6시까지 진행됐는데, 마치고 나면 한국 시차에 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해 업무를 시작하는 한국 시간대에 맞게 윗선에 전달해야 했다. 처음 며칠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시차는 3일 동안 맞지 않아 점심 무렵이 지나면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멍해지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렇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일하며 10일간의 출장을 끝내고 돌아왔다. 고생스럽지만 좋은 경험하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출장을 다녀오면 어느 정도 진행 상황이 정리되고 마무리가 될 줄 알았는데, 돌아오고 나서도 보고와 후속 온라인 미팅까지 줄줄이 이어지면서 결국 매주 매달이 바쁘기만 한 업무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것이 차라리 좋았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쓰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게 나에게 있어서 어떤 성장의 의미인지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기에만도 바빴으니까. 그 당시에는 긍정적인 마음, 좋은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열매도 따라오리라 믿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이런 바쁨은 연말까지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해결을 하고 또 해도 문제는 남아있다.


으쌰으쌰 다 같이 잘해보자로 시작했던 우리 팀의 분위기는 한 해의 중반이 지나면서 묘하게 변해 갔다. 어쩌면 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던 건데,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생기는 서열다툼과 경쟁에 민감하지 않은 나라서 눈치를 못 챘던 것일 수도 있겠다. 당시 팀 리더는 공석이 생기거나 R&R을 재분배해야 할 때 팀 내에 공식적으로 오픈을 하고 의사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기로든 따로 대화를 나눈 사람에게 할당을 해주거나 선착순으로 먼저 손 드는 사람에게 역할을 주곤 했다. 단순하게 말하면 '리더 맘대로'라는 거다.


처음 몇 번은 이미 결정된 사안 같은 업무 재분배 결과를 팀 미팅 때 공지받으면서 '어떻게 저 사람은 저 역할이 공석이 될 줄 미리 알고 있었지?' 혹은 '왜 저 사람이 저 부분을 담당하게 됐지?' 하며 얼떨떨한 정도였는데, 계속해서 명확한 기준 없이 자기 입맛대로 업무를 주는 걸 목격하면서는 기분이 싸했다. 리더의 성향으로 인해 팀원들은 친리더파와 안친리더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리더파에 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물밑 경쟁과 견제를 계속 이어갔다. (나처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관망하면서 근본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 몇몇은 리더의 무관심 속에 아웃사이더가 되어가기도 했다.)


리더의 매니징 능력에 대한 신뢰감 저하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도 있다. 한 번은 애매한 R&R 때문에 나와 다른 동료가 함께 한 업무 단위를 같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동료는 틈날 때마다 나를 견제하려 들었다. 최소한의 협업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그 동료는 칼같이 선을 그으며 각자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하자는 듯이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개인 톡으로 대화할 때와 단톡 방에서 나를 대하는 온도 차가 너무 커서 업무 외적으로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지속됐다. 하지만 회사에서 일로 만난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완전히 맞을 수만 있겠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진중한 어조로 리더에게 말씀드리고, 업무를 떼어달라고 요청했다. 업무 양의 문제는 아니고 각자 스타일이 좀 다른 것 같으니 각자 독립된 단위를 맡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리더는 이해한다는 듯이 흔쾌히 업무 단위를 변경해 주었지만, 그 뒤로도 그 동료와는 몇 번이나 업무 범위 때문에 자잘한 신경전이 있었고 결국에는 그가 팀 내에서는 분량이 꽤 큰 핵심 업무를 맡게 되었다. 본인이 고지를 점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즈음부터 그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이전과는 다르게 가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나는 역시 그 사람은 조금 거리를 뒀을 때 괜찮은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며 리더에게 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간의 불합리함과 비효율성은 덮은 채로 주먹구구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예외 없이 문제 투성이인 연말 평가 시즌이 되었다. 리더의 편파적인 업무 분배와 그에 따른 평가 결과인 고과가 공개되기 전, 리더-팀원 면담이라는 피해 가지 못할 과제가 남아있었다. 나는 이미 수년간 고과 면담에 대한 여러 가지 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인이 박혔다고 생각했었다. 퇴사 날짜를 늦추어서라도 내가 나쁜 고과를 떠안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높은 고과를 주고 가라고 했던 첫 회사의 리더, 금요일 오후 4 시대에 퇴근하고 주말 내내 메신저 확인도 안 하는 것은 근태 관리를 못한 것이라고 했던 두 번째 리더(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는 그 뒤 승진을 했다고 한다), 팀원 간의 갈등에서 어느 한 사람도 더 잘한 사람도, 덜 못한 사람도 없다고, 모두 다 똑같다고 일반화하며 갈등을 강제 소멸하려 했던 다른 리더, 이보다 더한 사례가 있을까 했는데, 믿기 어렵게도 더 극악한 면담은 가능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게 위에서 언급한 리더와의 연말 고과 면담이었다.


어차피 중간 등급이었다. 기똥차게 창의적이고 설득적인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하고, 밤잠 아침잠을 모두 줄이고, 팀 내 자잘한 업무들을 자발적으로 호의적으로 담당해도, 나에 대한 평가 결과는 1-5등급 중 3등급인 것이다. 알고 있었다, 이런 것쯤은. 그게 삼성이 수년간 나에게 준 이유 모를 패배감의 근원이었으니까. 1년을 어떻게 성실하게 잘 보냈건 간에 내 모든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3이라는 숫자로 환원되어 버린다는 걸. 결과가 과정을 무참히 살해해 버릴 수 있다는 것. 누구보다 처절하게 겪어 알고 있었다.

그 재단적인 평가에 찔려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다신 속지 말아야지, 수십 수백 번 다짐했었는지. 리더가 자기 옆에 끼고 돌던 몇 사람에게 높은 고과를 줬을 거란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그 결과를 시샘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직장 생활도 거래 관계 아닌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용'할 수 있게 내어주고, 적어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이 회사, 이 팀의 룰이니까. 난 그걸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이고, 그에 따른 결과까지 떠안는 게 책임감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뛰어넘는 리더의 한 마디가 있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OO님은 협업을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속으로 크게 당황했지만, 동시에 절대로 당황하지 않고 이 사람과의 대화를 끝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뒤로 이어진 리더의 말들은 내가 현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했다. 요컨대 위에서 언급했던 동료의 불필요한 견제로 인해 업무를 떼어달라고 했던 그 요청이 협업을 못하는 증거란다. 얼굴은 붉어졌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할 말을 못 하고 이 면담실을 나가지는 말아야겠다는 마지막 안간힘을 부여잡고 있었다.


"네,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음.. 그런데 지금 리더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시네요."

"연초에 업무를 다시 조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 때문에 제가 협업을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해외 출장건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A사와 협업하고, 매주 거의 매일 오전 온라인 미팅 진행하고, 유관 부서와 회의하고 업무 진행해 왔는데, 그럼 그런 일들은 협업이 아닌 걸까요?"


리더는 내 질문에 그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다른 이유를 대지는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자기감정을 못 이겨 울먹거리더니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져쓰! 결국 리더는 그 대화를 깔끔히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나에게 면담실을 나가보라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방금 겪은 상황이 1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뭔지. 울고 싶은 건 나인데..

그녀는 그 뒤로 한 달여간 내 눈을 마주치지도, 나와 대화하지도, 다시 이 이슈를 꺼내 해결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상황을 내버려 두었다. 그가 스스로 책임질 기회를 주고 싶었기에.


가관인건 그 후에 그 리더가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어 고과 확정 최종 면담 비슷한 걸 하게 됐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리더가 자기가 했던 이야기를 단기 기억상실증처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엔 내가 감정적으로 말했던 것 같아요."

아무렴요, 그러셨었지요. 보통 이 정도 되면 다음은 사과의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않는가?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남아 있었다.


"그건 그런데, 사실 그 말 내용 자체는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


??????....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연이어 폭격을 맞았다.


"사실 팀원들 중에 여러 명 계셨어요. OO님이랑 협업하기 어렵다고 하신 분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그런 이야기 못 들어봤어요? OO님 성향이 그런 거?"

"나는 이런 이야기 안 해도 되는데, OO님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야."


내 혀끝 안쪽 더 깊숙한 곳까지 던지고 싶은 질문과 항변의 말이 가득했다. 근데 순간 이제는, 여기까지 이렇게 하는 건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입을 다문 나에게 리더는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끝까지 해댔다.


"OO님은 제가 말한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리더님께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릴 것 같습니다."


그제야 리더는 내 고집이 꺾인 것에 대해 맘이 누그러진 것 마냥 갑자기 나에 대한 허울 좋은 칭찬을 던져주었다.

"난 사실, OO님이 영어도 정말 잘하고, 업무도 빠르게 배워서 정말 부러웠어."

"내가 말한 내용만 고치면 정말 앞으로 더 잘할 거야."

여기까지밖에 기억이 안나는 건, 아마도 그 뒤로는 내 기억에서 즉시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방에서 리더와 눈을 맞추고,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왜 끝까지 자기 생각을 놓지 않는 걸까 생각하며 뇌가 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뻔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여한 3등급에 대한 합리화 과정을 실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내가 대답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침묵하자 그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없냐는 형식적인 말과 함께.


나는 이 사람같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유치하고, 뻔뻔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이에게 정서적 해로움을 끼치는 내 눈앞의 존재처럼 되지 말자. 마지막 다짐을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지 않은가? 지금 내 모습만큼은 떳떳하고 의연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껍데기뿐일지라도 리더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꾹꾹 눌러 담아 한마디를 뱉었다.

 "감사합니다. 한 해 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인사를 꾸벅한 나는 유리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