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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랑 Oct 29. 2019

[퇴사일기#02] 쥐꼬리만한 퇴직금에 세금까지 떼어갔다

[작심삼일:] 오늘만 버티면 브런치 3일 연속 연재. "퇴사는 어려워."

회사에 입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퇴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입사하는 것보다는 쉬웠지만.


퇴사를 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STEP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밟은 퇴사 STEP과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STEP 1 사직서 제출하기


TV에서만 보던, 영화에서나 보던 진짜 사표를 제출해야 한다. 모두들 사표는 가슴에 하나씩 품고 있다고 하는데, 정말 사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를 항상 예뻐해 주시는 나름 '사표' 전문가라는 선배를 찾아갔다. 이 선배는 나의 퇴사를 도와준 장본인이다.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선배에게 합격 사실과 함께 사표를 어떻게 써야 하냐고 물어봤다. 그 선배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

일신상의 사유라는 말은 한 개인의 형편 때문이라는 의미다. 이 한마디가 나의 개인 사정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 이상 이유를 구구절절 읊을 필요가 없단다.


회사에 사직서 양식 따위도 없어서 그냥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아무 양식이나 가져다 써도 된다고 했다. 정해진 양식 같은 게 없어서 편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체계 없는 회사라는 생각이 든다.

인쇄한 사표를 봉투에 담아 나의 직속 상사인 부장에게 가져가야 할지, 회사의 행정업무를 보는 총괄부서에 가져가야 할지도 몰랐다. 이 선배는 "총괄부에 가져가면 된다"고 했다. 왜냐면 행정적 업무 처리에 사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건 회사마다 절차가 조금씩 다를 것 같다.




STEP 2 퇴사를 위한 IRP 계좌 개설


퇴사는 사표만 제출하면 뭐든지 자동으로 해결되는 줄 알았다. 사실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우선 퇴직금을 받을 IRP 계좌가 필요하다고 한다.


IRP가 무엇이냐? IRP는 개인형 퇴직연금(Individual Retirement Pension)의 약자다. 개인형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통장으로, 어느 은행에서나 가입 가능하다. 보통은 본인 회사 월급이 들어오는 은행에서 개설한다.


사표 제출 직전에 나는 IRP 통장을 개설하러 갔다. 그랬더니 은행 직원이 "퇴직금 한꺼번에 받으실 거예요 아니면 퇴직연금으로 하실 거예요?"라고 물어본다. 오잉?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다시 물어봤다.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는다는 의미는, 퇴직금이 들어오면 IRP 통장을 해지하고 그 돈을 곧바로 한꺼번에 받는다는 거다.

퇴직연금으로 한다는 의미는, IRP 통장을 그대로 두고 퇴직금을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하며 노후준비(만 55세 이후)를 위한 연금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요즘 금리도 워낙 낮은 데다, 모두가 피부로 느끼겠지만 전 세계 경제는 미중 무역분쟁의 여파와 불확실성으로 인해 침체된 시국이다. 은행에 묻어봤자 이자가 얼마나 붙겠는가?


게다가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돈을 55세까지 묵혀둔다고? 수익률이 1% 대도 간신히 넘고 있는데? (기사 '저금리 직격탄' 퇴직연금 1% 수익률 더 떨어졌다  참조)


이마도 곧바로 찾는다는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한꺼번에 받는 선택지에는 큰 함정이 있다.

바로 '세금'이다.


퇴직금은 뼈 빠지게 일하고 퇴사하는 나를 위한 선물 같은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정부는 소중한 나의 퇴직금에 세금을 다...^.^ 그것도 무려 16.5%나... 하하하하....


퇴직금을 곧바로 수령하면
세금을 16.5%나 떼 간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퇴직금이 멸치똥이 됐다...^.^


퇴직금은 보통 1일 평균임금 x 30일 x (총계속근로기간)이다. (참고로 1일 평균임금은 퇴사 이전 3개월간 근로자에게 지급된 임금의 총액을 그 기간 총일수로 나눈 금액. 자세한 건 검색 ㄱㄱㄱ)


차마 금액을 얘기할 순 없지만, 대부분 회사들이 연봉체계를 낮은 기본급에 각종 수당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놔서 퇴직금이 정말 멸치똥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하하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회사에 바쳤던 희생이 화르르 불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역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열정과 사랑, 긍정이 아니라 분노, 탄식, 배신감 이런 감정인거 같다.




STEP 3 자기 물품 및 신분증 반납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개인에게 사용하라고 노트북을 지급했었는데, 이걸 다시 반납해야 했다. 5년 8개월을 다니며 사용했던 수많은 데이터들을 다 백업하고 노트북을 마치 새것처럼 밀어버리고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내 노트북은... 회사에서 지급한 마크를 붙이기 싫어서 온갖 스티커로 도배가 돼있었다. 이걸 떼어내는 것도 엄청난 일이...... 될까봐 일부러 쉽게 떼어낼 수 있게 해두긴 했다. 음하하하

맥북에 이렇게 스티커 붙이는 실리콘밸리 힙스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회사로고가 박힌 S**SUNG의 뭔가 부족한 노트북..

노트북을 정리하면서 느낀 게, 나란 사람은 참... 내가 지내는 방은 깨끗하게 정리 못하면서 데이터는 무섭도록 날짜별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 때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두지 않아 기록이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문서들은 모두 ' yy.mm.dd [문서종류] 제목 ~~~ ' 이런 양식으로 통일됐다는거. 그리고 연도별, 월별, 주별로 폴더를 만들어서 정리했다는거다.


데이터가 정말 어마무시하게 많았지만, 지울 건 지우고, 백업할 건 외장하드에 백업하니 대충 마무리가 됐다.

깨끗하게 정리된 노트북과 그동안 신분증처럼 사용했던 사원증을 반납했다.


하지만 더 힘든 게 남아 있었으니... 그건 바로...




STEP 4 상사 및 임원 인사


바로 직속 상사인 부장과 임원에게 마지막 떠나는 인사를 하는 것이다. 직속 상사인 부장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퇴사하겠다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장에게 "그동안 많이 챙겨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이 무슨 언어파괴 수준의 인사인가 싶지만, 최대한의 예의를 담아보려고 했다.



최종 관문인 임원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먼저 문자를 드렸다. 퇴사 인사 드리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사무실에 있는 시간을 지정해주면서 그 시간에 오라고 하셨다.


이 임원분은 내가 입사할 때 차기 국장이셨고, 나를 몇개 주요 부서로 이동시킨 분이며(나의 의중은 묻지 않으셨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배치였던 것 같다), 나를 그래도 예쁘게 봐주시는 분.


이미 내 소식을 듣고 알고계셔서인지 표정이 담담하셨다. 왜 그만두는 것이냐고 묻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으셨다.

"그래, 하고 싶은 건 해야지." 라며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은듯 짧게만 답하셨다.



그렇게 욕하던 회사인데, 그렇게 다니기 싫다고 징징댔는데,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그만두는게 잘한것인가 수십번도 넘게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나를 좋게 평가해주고 아껴주는 상사가 있는데, 그만두는게 맞는 것인가, 하고.


오래 앉아있으면 불필요한 말들을, 미련퉁이 같은 내 감정들이 묻어나오는 말을 내뱉을 것같아서 짧게 인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회사 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아직 두번째 회사가 정해지려면 멀었지만, 첫번째 회사만큼 애착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첫 회사. 아직도 '전 회사'라는 표현이 잘 입에 안붙는다. 자꾸만 '우리 회사는~'이라는 말이 불쑥 나온다.



퇴사는 어렵다.




+ ) 그런데 6월 초에 퇴사했기 때문에 내년 초에 연말정산하러 가야한다는거.... ^.^ 하하하 뻘쭘 그자체 ^.^


++ ) 작년에 현대카드 더 그린을 회사로 배송해서 받았었는데, 1년 되고 PP카드가 새로 갱신되면서 다시 전 회사로 배송이 갔다네...? 하하하 이렇게 민망할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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