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을 마치고 나오는 길, 날씨가 너무 좋아서인지 아이도 나도 이상하게 바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봄 햇살은 부드럽게 피부를 간지럽히고, 공기에는 바람 한 점이 스르륵 섞여 있었다. 그런 날은 어딘가로 조금 더 걸어가고 싶어지는 법이다.
마침 아이가 먼저 말했다.
“도서관에 가서 놀까?”
그 말이 어찌나 반갑고 기특하던지.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노는 곳’, ‘즐거운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아이에게 도서관은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웃는 작은 세계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쩌면 도서관에서 보내온 시간 덕분일 것이다.
도서관에서는 아이가 느끼는 즐거움을 최대한 존중해주려 노력한다. 읽고 싶은 책을 혼자 고르는 성취감, 엄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읽어주는 동화 속 등장인물들의 목소리,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나오는 웃음과 놀람의 감정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도서관 지하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간식을 나눠 먹는 소소한 즐거움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이 모든 경험이 쌓여, 아이의 마음속 도서관은 ‘행복한 장소’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물론 매번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때로는 집중하지 못하거나, 갑자기 책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난이 더 좋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 자체로 귀하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장면에서 눈을 반짝이는지, 어떤 그림에 오래 머무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나에 대한 다짐도 함께 자라난다. ‘좋아하는 책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도와줘야지. 책을 통해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지. 그리고 나도, 언젠가 아이와 같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글을 건네는, 그런 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도서관에서 책만 보는 건 아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그 오고 가는 발걸음 사이에는 늘 작은 계절의 기적들이 숨어 있다. 봄에는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실려 아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고, 여름에는 진초록 풀 내음이 우리의 콧속을 간지럽힌다. 가을이면 나뭇잎이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단풍을 주워본다. 겨울에는 뽀얗게 내린 눈 위를 조심조심 걷고, 입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웃는다. 어느 계절이든, 가끔은 나비나 벌, 무당벌레가 인사를 건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배움이다.
그래서 더 이상 누가 먼저 한글을 떼었는지, 누가 큰 수를 더 빨리 셈하는지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숫자와 글자도 언젠가는 배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깔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길가에 핀 들꽃의 이름, 누군가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따뜻한 마음. 그 모든 것들이 ‘배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이와 함께 배우는 중이다.
또한 아이가 희귀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이의 삶을 어떤 틀 속에 가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질병이 있음’과 ‘행복함’은 결코 반대말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이분법으로만 생각해왔다. 건강하면 행복하고, 아프면 불행한 것처럼. 하지만 색안경을 벗고 바라보면,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는 게 아니었다. 이 아이도 충분히 웃고, 충분히 누리고,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다. 아이의 몸에 일어나는 일들만을 보지 않고, 그 마음에 맺히는 작은 감정들, 표정 하나하나, 무언의 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아이는 지금,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충분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 역시 그 삶의 속도와 방향을 존중하며 함께 걸어야 한다.
도서관으로 가던 그 날, 나는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느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들. 그 안에서 나는, 아이의 속도에 맞춰 걷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으로, 성취가 아닌 공감으로, 나의 기준이 아닌 아이의 마음으로. 빠르게 도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보며 걷는가, 누구와 함께 걷는가였다. 느리더라도, 그 길 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오늘도 아이를 통해, 아주 작고 분명하게 배워가는 중이다. 삶의 속도는 늦어도 괜찮다. 사랑이 깊어지는 건, 언제나 그 느린 걸음 속에서이니까. 나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느리고 따뜻한 삶의 문장들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