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아내와 싸우는 법

8. 치고 박진 않는다

by 이안 문과PM

"여보, 안되겠어 나 이직준비 해야겠어"


점심시간도, 쉬는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디자이너랍시고 D자만 들어가면 전부 일을 몰아주는 회사에 지친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울분을 토로하고 있었다.


원래 미대를 나와서 나와는 전혀 다른 미적감각을 가지고 원래도 포토샵, 일러와 같은 Adobe는 잘 다뤘지만 UX/UI 양성과정을 거쳐 프론트엔드의 능력치도 가미되니 내가봐도 더 좋은 회사를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아내의 디자이너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솔직히 나는 이력서 1장, 커버레터 1장만 준비하면 전부였지만, 디자이너 이력서는 이력서 자체에 포트폴리오도 추가하여 자기가 만들어온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여줘야 했기에 표지부터 감각적인 표현이 시작되었다. 테마는 Professional Simple. 깔끔하지만 전문가스러운 느낌만들기. 말이 쉽지 레퍼런스부터 옆에서 지켜만 보는 문외한은 포토샵으로 사각형만 집어넣어도 신기한 모양새였다.


디자인이나 배치는 내 전문이 아니라 절대 입도 대지 않았고 표지에 적을 문구와 이력서 내용을 추천해달라도 해서 여러가지 샘플을 찾아 보여주면서 머리를 맞댔다.



문제의 의견충돌은 이력서 내용을 적으면서 발발했다.

Pros & Cons (성격의 장단점)을 적으려는데, 단점으로 워라밸을 중시하고 작업효율을 위해 적절한 쉬는시간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적었길래, 그래도 회사에 몸담은 시간이 길어지고 있던터라 우려를 표해봤다.


"여보 어차피 이력서는 인사담당자가 면접에 부르느냐 안부르느냐를 결정하는 문서인데, 굳이 단점에 관리자가 보기에 마이너스인 부분을 적을 필요가 있을까? 워라밸을 중시하거나 업무효을을 위해 쉬는시간이 보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력서가 통과하고 면접에서 충분히 티키타카하면 될 거 같은데?"


그러자 아내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해주었다.


"이력서나 포폴(Portfolio)를 그 회사에 맞게 만들어 내더라도 나는 내 개성이 듬뿍 담겨있어야 한다고 봐. 장단점에서도 말이지. 내가 만약 다른 지원자들처럼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는 단점을 적어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그래 면접에 갈 수 있을진 몰라도 회사가 당연히 보장해주어야 할 부분도 지키지 못해 내가 말한 부분이 아니꼽다면 그 회사는 안가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도 밥도 못먹고 8~9시간 앉아서 미친듯이 일만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오려는데, 똑같은 회사를 간들 또 나오지 않을까?회사도 나를 필터링하는데, 나도 회사를 필터링해봐야지"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항상 회사에 잘 보여서 무조건 들어가고 나서 내 거취나 입지를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내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정말 회사와 롱런하려면 초장부터 서로 탐탁치않은 부분을 오픈하고 만남을 가지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나보다 3살 더 많지만 이럴때보면 더더 MZ같은 아내였다. 오히려 난 회사가 주는 월급의 노예가 되가는 중이였으니까.


그렇게 이력서의 장단점 부분을 적을까 하다가 그래도 우리나라 정서상 아직꺼지 K-이력서에서는 기회보다 기회를 주지 않는 쪽이 많다는 부분을 서로 동의하였고 결국 장단점을 빼고 회사명만 나열해뒀던 Work Experience (업무경험)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기입하기로 했다.


A회사 (00년 00월 ~ )

B회사 (00년 00월 ~ 00년 00월)

C회사 (00년 00월 ~ 00년 00월)


에서 다음과 같이 바꿨다. (예시)


A회사 (00년 00월 ~ )

포스터디자인 ~

회사홈페이지 디자인 ~

인쇄디자인 ~

B회사 (00년 00월 ~ 00년 00월)

a업무

b업무

c업무

C회사 (00년 00월 ~ 00년 00월)

a업무

b업무

c업무

UX/UI양성과정 수료 (00년 00월)



항상 나와는 180도 다른 생각을 가진 아내와 얘기하다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접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부분까지 닮은 점이 이렇게 없는지 뮨득문득 깜짝 놀라다가도 오히려 다른 점이 가장 매력적이였던 게 바로 아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개성과 취향이 뚜렷하고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살면서 마이너스로 작용한 적이 없던 아내에게 이력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개성표현의 장이었다. 오히려 개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지금 회사에 묵묵히 잘 다니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다음 스텝을 위한 준비기간일테다.


빨리 지금 회사를 탈출해서 더 나은 곳에 꼭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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