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교실 (1)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이 굉장히 시끌벅적대고 있었다. 원래도 시끄럽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심했다. 여기저기에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으악, 으흐흐. 야, 너무 빨리 넘기지 마. 으악!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해영이가 멀뚱멀뚱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영아, 뭐냐?” 해영이는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애들이 그렇지. 이상한 것 보고 있어.” 이상한 게 뭘까? 궁금했다. 그날은 학교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날이었다. 알고 보니, 헉!
설립자 이사장은 우리 학교 시설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우리 학교 화장실은 수세식이라면서 깨끗한 학교 환경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수세식 화장실을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화장실 휴지가 고급스러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런 종이 휴지 말고 새하얀 고급 화장지를 사용해야 휴지가 물에 바로 녹는다는 거였다. 휴지통이 따로 필요 없기에 화장실이 깨끗하게 유지된다고 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뽀삐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휴지통 없는 수세식 화장실! 아이들도 대개 깨끗한 환경에 찬성했다. 그렇군, 그런가? 그렇지, 등등.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흰 두루마기 휴지를 하나씩 가져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교생이 매월 각자 딱 하나씩만 가져오면 된다나.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시절에는 그런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학교와 학생은 서로 도와야 했다. 요즘 시대에 학생들에게 학교 화장실에 쓸 휴지를 공급하라고 하면 아마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다. 8시 뉴스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시대였다. 지도자의 한마디에 모두 열심히 따르던 시대였다. 수세식 화장실이 깨끗하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집에서는 꾹 참고 학교에 와서 볼 일 다 보고 시원하게 하교하는 아이도 꽤 많았다.
시끌벅적했던 그날은 휴지 공급하는 날이 아니었다. 그날은 폐지를 수집하는 날이었다. 폐지를 왜 학교에서 수집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환경운동이나 에너지 절약 운동이었을 것 같다. 아무튼 전교생은 집에 있는 폐지를 가져와야 했다. 폐지라고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대개는 그냥 헌 책이었다. 집에 있는 헌 책을 학교에 제출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집에 있던 낡은 소년잡지를 두어 권 가지고 갔다. <소년중앙>과 <새소년>… 유년 시절의 추억을. 나의 과거를.
하지만 일부 아이들은 미래지향적이었다. <소년중앙> 같은 유년의 잡지를 가져온 게 아니었다. 당시에 절찬리에 판매되던 <성인 만화>를 가지고 왔다. 대유행의 성인 만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는데 버스정류장 가판대 같은 곳에서 화려하게 진열되고 쉽게 판매되었다. 1) 원칙적으로 청소년에게는 판매가 금지되고 성인만 볼 수 있는 야한 장면이 많은 만화였다. 폐지로 성인 만화를 교실에 가져온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래서 교실 곳곳에서 성인 만화 관람전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아이가 만화를 펼치면 우르르 몰려들어 7~8명이 함께 고개를 들이밀고 보았다. 으악, 야, 너무 빨리 넘기지 마!
나와 해영이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근처에 가서 같이 볼까 했지만 경쟁이 심한 것 같아 그냥 포기하고 앉아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쉬는 시간마다 비슷한 광경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몇 교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점심시간 끝날 무렵이었는지, 아무튼 나는 자리에 앉아서 소년중앙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자리 아이가 내게 돌아섰다. 그 친구가 아이들에게 대여해 준 성인 만화가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야, 우리 이거 바꿔 볼래?” 선정적인 표지의 책자를 불쑥 내밀었다. 내 손의 소년잡지를 쳐다봤다. 자기 책은 볼 만큼 다 봤고, 이제 유년 시절의 추억에 빠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와 해영이는 서로 눈을 한번 바라보았다. 해영이는 아무런 사인도 보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나 혼자서 고독하고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소년중앙>과 <새소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성인 만화를 건네받았다. 형사가 나오고, 악당이 나오고, 위기에 처한 반라의 여인이 등장하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옆자리의 해영이도 나지막이 침을 삼키더니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내 주변에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서로 밀치며 외쳤다. 야야, 천천히 천천히! 아이들이 외쳤다. 야, 이 페이지에는 별것 없네. 빨리빨리 넘겨. 나는 이제 막 첫 쪽을 펼쳤을 뿐인데, 뭘 천천히! 뭘 빨리빨리! 정말 정말 이건 정말 분명히 틀림없는 사실인데, 나는 그때 막 처음 두 쪽을 보았을 뿐이다. 위기의 여인과 그녀의 드러난 허벅지를 잠깐 봤을 뿐이다. 19금이 시작되는 다음 쪽으로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내 등에 있던 교실 후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등 뒤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순식간에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썰렁한 등 뒤를 천천히 돌아다보았다. 앗, 체육 선생님… 호랑이 체육 선생님… 아침마다 교문에서 야구 방망이 들고 서 계시는 체육 선생님…
체육 선생님과 그의 야구 방망이가 동시에 나를 노려보았다. “야, 너 이거 뭐야?”
아니, 이건 내 것이 아니고, 내 책은 소년중앙인데, 미치겠네. “아니요. 선생님…”
“뭐가 아니야, 임마. 이거, 성인 만화잖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이런 걸 학교에 가져와!”
“아니, 아니… 저… 그게 아니고…”
나는 성인 만화의 원래 소유자인 앞자리 친구를 보았다. 친구는 정면을 향한 채 돌처럼 앉아 있었다. 건전하게 펼쳐진 소년잡지 <새소년>을 두 손으로 엄숙하게 누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위인전 속의 인물 같았다. 유리한 거래를 마친 철강 왕 카네기처럼 묵직하게.
나와 해영이는 현행범으로 목덜미를 잡힌 채 체육 선생님에게 끌려갔다. 훈육부 교도실인지 음산한 곳으로 끌려가 엎드려뻗친 뒤에 야구 방망이로 허벅지를 사정없이 맞아야 했다. 솔직히 해영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저 내 짝으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체육 선생님도 웃겼다. 그 많은 흩어진 아이들은 잡지도 못하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 학생만 잡았을 뿐이다. 어쨌든 나는 해영이에 미안했다. 해영이는 그저 공범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무언의 추종자 정도였을 뿐이다.
해영이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나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담임인 이상주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이 사건을 전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난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체육 선생님이 나와 해영이를 체벌한 것으로만 넘어가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체육 선생님은 자기 반 아이도 아닌 학생들을 강력히 체벌했으므로 우리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할 게 분명했다. 비폭력주의자인 선생님에게 한마디할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종례 시간에 이상주 선생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학급은 오전 내내의 시끌벅적을 모두 삼켜 소화해 버린 듯 조용했다. 선생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니? 체육 선생님에게 맞은 사람이 누구야? 일어나봐.”
나는 창피했다. 선생님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게 되다니. 어쨌든 쭈뼛쭈뼛 일어났다. 해영이도 일어났다. 우리는 교실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날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냥 앉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어른들 잘못이에요. 성인 만화 그런 책을 여러분 손에 들어가게 놔둔 우리 어른들 잘못이어요. 그런 걸 쉽게 팔고 아이들 손에 들어가게 놔두고. 학교에서 폐지 수집한다고 그런 책을 가져가도록 한 것도 모두 우리 어른들 잘못이어요.”
그걸로 끝났다. 더는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딱히 선생님에게 찾아가 변명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선생님만 보면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어머니에게 연락하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통신망이 따로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아마 누군가의 학부모를 통해 전해 들었겠지만,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불러 자초지종을 불라고 했다. 어서 불엇! 나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불었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 그러니까, 해영이는 단순 가담자이고 주동자는 너라 이거지.
아 들 : 예… 어쩌다 그리된 거죠.
어머니 : 그러니까, 선생님이 이게 너희 잘못은 아니고 우리 어른들 잘못이라고 했다고?
아 들 : 예…
어머니 : 어른 잘못이면, 이 엄마 잘못이라 이거지. 그런 뜻으로 들리네.
아 들 : 글쎄,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머니 : 그러니까, 해영이는 단순 가담자 그냥 동조자이고, 너는 주동자이고… 그럼 어른인 이 엄마가 주모자가 되는 거네? 제일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엄마가 주모야, 응?
아 들 : 에이, 엄마가 국밥 파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왜 주모야? 그냥 마님 해요. 마님.
어머니 : 이놈아, 주둥이를 그냥! 허벅지에 파스나 붙여!
다음날, 도시락을 열자, 달걀과 진주햄 소시지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촘촘하던 것이 좀 널널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2)
하지만, 나의 이 첫번 째 사고는 그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배반은 아직 손톱만큼도 일어나지도 않았다!
개봉 박두! 기대해도 되고, 말아도 되고 … ㅎㅎㅎ
1) 1970년대 중반 <성인 만화>는 선정적인 그림과 내용이 많았다. 북한 김일성의 사생활을 비장한 것과 정치 깡패들의 무용담 속에 에로틱한 장면을 많이 담았다(고 사람들이 전한다. ㅎㅎ). 유흥가에 흘러들어 간 비련의 여인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김민 화백의 <인간 0(제로) 지대> 같은 리얼리즘 문학 같은 고품격의 작품도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일본 소설을 보고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김민 화백은 청소년들도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대표작이 <불나비> 시리즈이다. 중국 천추 전국 시대를 무대로 이름 없는 무사가 천하 제일 검객으로 거듭 나는 이야기인데 그림체도 독특했고 감성적이고 철학적이었다. 김민 화백은 이 불나비 시리즈를 그리기 위해 중국 소림사 이야기에터 일본의 사무라이 미야모투 무사시의 일화까지 가져와 독특한 스토리와 놀라운 영상미의 극화를 창조했다. 우리나라 소설계에 이상이 있었다면, 만화계에는 김민 화백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했지만, 우리나라 문화계에서 김민 화백에 대한 재평가가 보다 더 활기차게 이뤄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기타 김민의 불나비에 관한 자료는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2) 진주햄 소시지는 추억의 식품이다. 그 시절 도시락에 이거 없으면 하루종일 우울했다. 내 동생 둘은 어머니가 오빠만 너무 챙긴다는 불만이 있었다. 내가 불미스런 사고를 치면 내 도시락의 진주햄 소시지는 그날 동생들에게 풍족하게 제공되기도 했다는 미확인 추측성 기억도 있다. ㅎㅎ
아래는 진주햄 소시지 광고인데 존경하는 신동우 화백의 만화 광고이다. 이것도 추억이다. 옛날 기억 복원하려고 검색하다가 보니 자꾸 자꾸 이런 게 튀어나온다. 연재 에피소드도 당초 2회 정도로 마무리 하려던 것이 기억의 얽힘 현상으로 자꾸만 더 늘어나고 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