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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Sep 20. 2024

괴도 신사 팽, 중학생 되다

다가오는 첫날 첫 시간의 공포… 절망… 우울


1) 2) 3)... 등은 주석입니다. 해설 주석이라기보다 재미있는 연상 혹은 다른 에피소드를 담은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기 위해 이발소에 갔다. 그 시절 중고등학교 남학생은 모두 삭발하듯 머리를 짧게 밀어야 했다. 일부 사립중학교는 예외였는지 모르겠으나, 대부분 학교에서는 스포츠형 머리를 전국적으로 적용하는 국가 표준 규범으로 삼고 엄정하게 지켰다.       


처음 머리 밀던 날, 통속적으로 우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분명히 우울하지만, 훗날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광경, 마치 통속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 이런 경우를 본 필자 이언 엑스 페이퍼(IanXpaper)는 ‘통속적으로 우울하다’라고 표현한다.) 

           

거울 속의 앳된 중 머리를 바라보는 어설픈 예비 중학생의 절망적인 눈. 울고 싶었다. 절간의 동자승도 아닌데 우아한 머리카락을 거의, 전부, 몽땅, 도매급으로, 하염없이, 매정하게, 속절없이 싹 밀어버리다니! 동네 이발소의 거울 위로 시(詩)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유년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이발소 거울 앞에 선

  초원의 언덕 까까머리 소년이여 1)          


처량한 눈빛으로 머리를 보고 울컥했다. 뭐,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고? 이 꼬락서니로 무슨 야망을 품으라는 건가. 영락없이 속세를 떠나 온 동자승이고만. 물론 동자승보다는 키는 컸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의 고독하고 의연하던 나의 용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앳된 꼬마 시절로 회귀해 버린 느낌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풍운아의 설렘은 풀이 확 죽어버린 내 모습에 그만 질린 듯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발소 어른들과 어머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 환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도대체 뭘 축하하고 뭐가 그리 고맙단 건지. 참나…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남자답게 씩씩해라. 숨어 다니지 말고, 남들 앞에 좀 당당히 나서고 그래.” 이발소 문을 열며 어머니가 내 등을 힘껏 밀었다.     


“내가 언제 숨어?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숨어?” 벌초 된 머리를 만지며 울컥을 꿀꺽 삼키던 나.        


“넌 괴도 신사 루팡인지 흉내 내며 꼭꼭 숨어 다녔잖아. 엄마가 너 찾으러 그 어둠의 도서관 2층까지 갔다. 만화방에 있던 네 친구들한테 물었더니, 네가 학교 끝나면 쪼르륵 거기로 달려갔다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루팡 흉내를 낸 게 아니고, 루팡 읽으러 간 거지.” 2)           


“책 속으로 숨어버린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도 터잖아. 괴도 신사 팽 양반. 그런데 그 루팡이란 이름이 쪼게 웃긴다. 빵 이름인 듯도 하고 어째 좀 거시기하다. 누팡이라니, 누구 팽 씨  생각난다. 누팡, 누구 팽!”          

“누 팡이 아니고 루야, 루팡이야.”          


“네 아빠 이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웃겼던지. 세상에 팽 씨가 다 있네. 웃음 참기 힘들었다.”          


“엄마, 그거 두 번만 더 하면, 백만 번째 듣는 거야.”          


“집에 와서 막 웃었지. 미스터 팽? 미스터 팽이라니! 고향 친구랑 두 손 잡고 뛰면서 웃었어. 훗날 내 아들이 미스터 팽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어서 가자. 이제, 중학생 되어야지, 미스터 팽!”          


2월의 마지막 날이었고, 2월의 쌀쌀함이 썰렁한 내 머리를 매몰차게 휘감았다.           



     

그렇다. 내 이름. 중학교에 올라가면 우선 그게 제일 큰 걱정이었다. 팽 씨는 희귀한 성씨라서 늘 아이들의 웃음거리였다. 단순한 희귀 성이 아니었다. 대박 취급 받았다. 팽! 하고 코 푸는 흉내 내는 아이, 팽이처럼 열나게 때려야 팽팽 머리가 돌아가는 거냐고 비웃는 아이. 토사구팽의 그 팽이냐고 놀리는 선생님까지. 너희들, 이 기회에 토사구팽의 뜻을 알아둬라! 어쩌고 저쩌고…     


해마다 새 학년 새 학급에서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첫 시간, 나는 그 시간이 제일 싫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자 담임이 압권이었다. 내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듬거렸다.       

 

“어… 팽?… 어… 이거, 오타겠지. 맹… 팽이 아니라 맹이겠지? 맹이언!”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은 지우개를 들고 출석부의 내 성을 빡빡 지우려고 애를 쓰다가 펜을 들었다. 고쳐 쓰려고.           


우씨, 왜 저런데. 내 이름을 아예 지우려고 하네. “저, 팽입니다…”          


선생님이 펜 든 손을 멈췄다. “뭐? 맹 씨가 아니라고? 팽이라고? 거 희한하네. 맹… 팽… 팽이언!”          


우씨, 좀 작게 부르지. 고함 지르고. 왜 저러냐. “에… 에… 예… ”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날 찾았다. 어쩜 샘들은 모두 한결 같냐. “어디 있어? 팽! 손들고 고개 들어봐.”          


아이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전 학급의 낯선 눈동자가 모두 나를 향했다. 나는 책상 위에 곱게 내려둔 손을 가슴까지 슬쩍 들어올리며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치켜올려 아이들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입술-깨물고-뭘-보냐-눈빛으로. 3)           


이게 해마다 겪었던 새 학기 첫날의 트라우마였다.               


나는 중학생 시절을 산뜻하게 출발하고 싶었다. 정말 산뜻하게. 맑고 푸르고 멋지게. 그런데 운명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팽! 이라는 놀림의 깃발을 하늘 높이 매달고 출범하게 될 것 같았다.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는 바닷가 항구의 선박 정착 장에서 거세지는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여운 요트 범선이 따로 없었다. 악몽의 항해가 눈앞에 선했다.      




이발소를 나서 어머니와 함께 내가 입학하는 H중학교 가는 길을 확인하러 갔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큰길을 건너야 했다. 어, 이쪽은? 나는 반가웠다. 큰길을 건너자마자 내가 지난 1년 반 동안 자주 갔던 바로 그 도서관이 거기 있었다. H중학교는 그 도서관을 지나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는 도서관을 지나면서 이내 다시 우울해졌다. 그곳에 이제 자주 갈 수 있을까? 중학생이 되면 공부에 열중해야 하니, 소설 나부랭이 읽을 시간이 없을 거라고 이웃집 할머니가 말했던 것이다. 이웃집 할머니는 나만 보면, 교회에 가자고 꼬시곤 했었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소문에 듣자 하니 H중학교는 기독교 계열의 미션 스쿨이라는 거였다. 성경만 읽고 소설을 못 읽게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함께 도서관에서 멀어지던 내 발길이 더욱 무겁기만 했다.    

  

훗날, 나는 그 도서관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속의 분관이었다. 유년 시절에 나는 이 도서관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서울로 이사해 온 지 2년밖에 안 되었고, 그때까지 도서관이란 걸 구경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정말 놀라운 일로 느끼는 것은, 그 당시 국립중앙도서관은 전국에 몇 군데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남산이란 이름을 가진 곳에 있었다. 초등학생인 내가 남산까지 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전학간 A초등학교 정문에서 바로 길만 건너가면 되는 장소에 초연하게 분관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도서관에서 자주 읽었던 책이 바로 괴도 신사 아르센느 뤼팽의 모험담이었다. 그곳에 소장된 책은 계림 문고 아동용과는 사뭇 차원이 달랐다. 뤼팽이 등장하는 걸작 『기암성』을 비롯한 모든 시리즈가 양장본이었다. 두터웠고, 무엇보다 삽화가 총천연색 칼라였다. 나는 열람실 책상에 앉아 『기암성』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간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기억 속의 그 도서관에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분명히 있긴 있었을 텐데, 기억 속의 나는 오직 혼자였다. 길게 나열된 텅 빈 열람실 책상 중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괴도 신사 뤼팽의 슬프고 낭만적인 모험에 열중했다. 기암성의 무대가 된 프랑스 노르망디 북서부 해변에 있는 에기유 크뢰즈(L’Aigulle Creuse) 바위 옆의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보트 위 사악한 악당의 모습에 전율했다. 그 무섭고 두려운 삽화를 내려다보다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는데, 아무도 없는 도서관 열람실 책상 위로 오후의 어스푸름한 햇살이 가득 내리고 있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의 공간에서 마치 모든 사물이 마구 뒤섞인 듯한 그 인상적인 도서관 실내의 정경은 내 유년 시절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5)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 우수(憂愁) 어린 눈빛으로 졸업하고, 사색에 잠겨 조용하고 침착하게 걷는 아이. 집에서는 여전히 개구쟁이이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신비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시선을 던지는 아이. 그런 아이가 이제 애송이 중학생 신입생으로 전락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3년 동안 입으려면 넉넉해야 하기에 한가위 보름달처럼 풍성하게 맞춘 중학생 교복. 이건 뭐, 소매가 팔등을 거의 덮어 버리는 거였다. 교모는 머리를 빡빡 깎고 나서인지 푸석 가라앉았다. 내가 뽀빠이도 아니고, 뭐 이런 모자를.      


나는 무척 마른 아이였다. 아버지는 내 별명을 KBS라고 지었다. 갈비씨(KAL-BI-SSI)의 약자라면서. 말라서 더 서러운 교복이었다. 책가방은,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그 망할 책가방은, 등이나 어깨에 메는 게 아니라, 한 손으로 단정하게 쥐고 다니도록 손잡이가 손바닥 크기에 맞춰 특수 설계된 가방이었다. 5)

          



이윽고 드디어 입학식 날…     


내가 다닐 H중학교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지대에 자리한 학교였다. 끝없이 복잡한 달동네 골목으로 들어서 계속 나오는 고불고불한 계단을 숨차게 올라가야 했다. 높은 지대에 이르러 골목을 벗어나면 제법 넓은 길이 나오고 그 길가에 문방구 같은 가게들이 있었다. 중학교 교문에 이르면 다시 또 위로 한참 올라가야 하는 언덕길이 교정 안에 있었다. 시멘트로 단장된 그 언덕길 양쪽에는 교훈을 적어 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이다." 뭐 저런 교훈이 있냐? 난 처음부터 승리자이고 싶은데, 숨만 차구나. 


    



3월의 하늘은 제법 맑았고 넓은 운동장에서 신입생 입학식이 열렸다.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서 H중학교로 진학한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낯선 아이들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 배정을 받았다. 나는 1학년 5반이었다. 1학년 5반의 긴 줄 끝에 서서 담임 선생님이 누구인지 살폈다. 여자 선생님이었다. 아주 젊은 분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수수했다. 흰색 바탕에 작고 선명한 물방울무늬가 달린 투피스 양장을 입었는데 평범하고 다소 고전적인 모습이었다.      


선생님을 따라 5반 아이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갔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서 대충 앉았던 것 같다. 이윽고 선생님이 입학을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나는 차츰 긴장했다. 선생님이 교탁 위에 올려놓은 출석부에 자꾸 눈길이 갔다. 아, 곧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오겠지. 선생님도 웃으실 테고, 아이들도 첫날부터 대박이라며 날 비웃을 게 분명해. 저 징그러운 눈빛 좀 봐. 호기심의 눈초리들. 머리는 모두 까까머리. 교복은 모두 헐렁헐렁, 뭔가 먹잇감을 노리고 있을 거야. 으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선생님이 모두의 이름을 불러보겠다며 출석부를 펼쳐 가슴에 안았다. 선생님의 얼굴은 딱히 모난 곳도 없었고 주목할 만큼 미모를 자랑할 만한 곳도 없었다. 평범했다. 다만 선생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눈. 표정이 변화무쌍한 것은 없었고 조용하고 고요했다.      


강…철…수. 

네.      


선생님은 첫 번째 아이 이름을 천천히 부르고 손든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별말씀 없이 다시 출석부로 눈길을 돌렸다.      


김…해…영.

네에.      


… …


심…흥…렬.

네!


… …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었고 따라서 내 이름인 “팽”이 나오려면 후반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부터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악몽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차 씨가 지나고… 최 씨가 몇 명 있을 것이고… 태 씨는 아마 없을 것이고… …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확인했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담담했다. 조금 전 다른 아이들을 불렀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호흡이나 눈 깜박이는 것조차, 전혀 달라지는 기색이 없었다. 내 차례 아닌가?     


팽…이…언.

네…     


선생님은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웃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 볼 때와 마찬가지로 슬쩍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출석부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아이들도 모두 조용했다. 아무도 웃거나 날 쳐다보거나 하지 않았다. 저마다 딴생각에 잠겨 있거나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아이들 시선을 끌지도 않았다. 희한한 팽 씨라는 성을 가진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 물론 예민하고 귀 밝은 아이 한두 명이 흘끗 나를 바라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자신이 뭔가 들었지만 그게 제대로 들은 게 맞는 지 의아해했다. 지금 들은 게 뭐지? 팽? 맞나? 하는 표정이었다. 선생님과 다른 모든 아이가 잠잠하니까 고개만 갸웃하고 지나쳤다.  

    

하 씨와 홍 씨와 황 씨 아이가 호명되고 선생님은 출석부를 덮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아마 가장 큰 충격이었던 같다. 아니, 충격이긴 분명히 충격인데, 너무나 감동적인 충격이었다. 나는 어안이 좀 벙벙했다. 멍하니 선생님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선생님이 대단한 분이란 걸 직감했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을 늘 존경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학교 선생님을 마냥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이곳, 중학교 첫날 첫 시간에, 저기, 조용히 서 계시는 저분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이란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고 칠판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나는 국어를 가르치고, 내 이름은…”     


이 상 주     


선생님 이름은 이상주!      


"내 이름은 이상주입니다. 반가워요. 여러분."       



   


1)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 옆에서>를 오마주 겸 패러디했다. “까까머리 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적 표현이 처음에 아래 구석에 있었으나, 시의 생명인 절제미를 훼손한다는 판단으로 과감히 삭제했다. 


2) 원래 당시에는 괴도 신사의 한글 번역 이름이 루팡이었다. 뤼팽은 훨씬 뒤의 표준어 번역판에서 적용된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두 개 명칭을 혼용해서 때에 따라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표기하기로 한다.         


3) 배우 손석구 씨가 당시 눈을 치켜들며 째려보던 내 표정을 그대로 표절해서 요즘 써먹고 있다. 하하.     


4) 기암성에서 첫 장면은 나중에 뤼팽의 아내가 되는 레몽드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어두운 저택에 누군가 침입하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첫 장면부터 두근거렸다.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영국의 헐록 숌즈(셜록 홈즈)가 비겁하게 총으로 레몽드를 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슬펐고, 사랑이 뭔지 잘 몰랐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아픈 가슴을 통해 어렴풋이 감지했다. 뤼팽은 슬픔에 잠겨 먼 곳으로 자취를 감춘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속 좁은 마음으로 영국의 셜록 홈스를 최악의 인물로 만들어버린 작품도 바로 기암성이다. 훗날 나는 초거대 양장판 [주석 달린 셜록 홈스]를 두 권 모두 소장하는 셜로키언이 되었지만, 뤼팽에 빠져 지냈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과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셜록 홈스를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저주했었다. 이 역시 통속적으로 우울한 추억의 하나이다. 하하.     


5) 만화 영화만 일본 것이었던 시절이 아니었다. 까까머리와 교모와 교복과 책가방까지 전부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그럴 만도 했다. 딱히 다른 모범적인 사례를 본 적도 없었으니. 게다가 서구적인 느슨하고 자유로운 교육 풍습은 지나치게 자유로워 보여서 우리나라 정서와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 관료나 학교 선생님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보고 배운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굴 탓하기에도 우울한 사실이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이다. 통속적으로 엽기적인 추억이지만, 그래도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이 아련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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