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 시절의 두 번째 끝내주는 괴물
상계동 주공아파트 9단지의 상가 앞을 걸어가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살던 시기였다. 아, 요괴인간이다! 비디오 가게 주인이 매장 정리를 위해 땅에 장판을 깔고 비디오를 헐값에 팔고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 일본 애니메이션 <요괴인간>이 있었다. 반가웠다. 꼬맹이 시절 좋아하던 만화! 나는 별생각 없이 비디오를 사서 집으로 가져왔다. 딸에게 비디오를 흔들었다. 어린 딸은 신난 얼굴로 옆에 와서 앉았다. 비디오 플레이어에 요괴인간을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만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 무시무시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나쁜 요괴가 공중을 붕붕 떠다녔는데, 몸은 없고 머리만 있었다. 웃음도 사악하고 소름 끼쳤다.
으악! 딸이 비명을 질렀다.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아빠가 무서운 거 보여줬어!
나는 재빨리 비디오를 끄고 꺼냈다. 아내가 달려오더니 노려봤다. 애한테 도대체 뭘 보여준 거야! 또 <아담스 패밀리> 같은 거야? 어둡고 칙칙한 마녀 나오는 거? 나는 머뭇거리며 변명했다. <아담스 패밀리>는 애랑 나랑 둘 다 재미있게 보았어. 코미디잖아. 오늘 것은 내 실수야. 옛날 만화영화인데 이렇게 무서운 줄은 정말 몰랐어.
그렇다. 옛날 만화영화 중에는 무섭고 잔인한 것도 많았다. 요즘 시대에 아이들에게 그런 걸 보여주면 절대 안 된다.
그 시절 어른들은 왜 만화책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모르겠다고 누군가 말했다. 문득 어른들이 만화책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떠올랐다. 공포물이었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귀신 이야기는 무섭긴 하지만 애잔하기도 했다. 공포물은 아니었다. 공포물은 호러물인데, 호러 horror의 의미에는 경악과 불쾌함, 체험에 가까운 무서움이 포함된다. 따라서 어른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공포물인 동시에 만화책"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딕 분위기의 만화 <요괴인간>은 우리나라가 접한 최초의 "공포물인 동시에 만화책"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동물로 등장했기에 어른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스티븐 킹은 B급 공포물이 일종의 불량 식품 취급당한다고 말했다. 불량 식품을 먹어봐야 우량 식품의 맛도 알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뭐 나의 어린 시절에는 길거리에서 사 먹는 모든 식품이 대부분 불량 식품이었다. 추억의 달고나(또뽑기) 역시 불량식품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에 내가 본 것은 TV에서 상영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소년중앙 별책부록으로 나온 종이책 만화 <요괴인간>이었다. 애니메이션과 종이책의 스토리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만화책의 그림체가 영상 그림체보다 훨씬 순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에는 일본 콘텐츠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타이거 마스크, 우주 소년 아톰, 도전자 허리케인, 철인 28호, 마징가 Z, 들장미 소녀 캔디,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요술공주 세리… 수많은 만화가 대부분 일본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희미했고 우리나라 만화가들이 일본 것을 베꼈다. 원작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고 우리나라 화백의 이름을 저자로 등재하는 경우도 흔했다. 마징가Z가 우리나라 것인 줄 알고 한일 야구전에서 응원가로 부를 정도였다. 일본 응원석에서 일본어 가사로 마징가Z가 울려 퍼졌을 때,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대한민국 국민도 많았다. 어, 뭐야? 일본 거였어?
하긴 일본은 콘텐츠의 절대 강국이었고, 지금도 뛰어난 작품들이 꽤 많다. 특히 만화에서는.
일본 작품이라고 해서, 이제 와서 한탄의 소리를 내쉬거나 등을 돌릴 필요는 딱히 없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어린이를 위한 우리 고유의 콘텐츠가 부족했을 뿐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적으로 바빴으니 그 시절의 문화 정책과 그 시절의 어른들을 무작정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동심의 세계에서는 국경이 따로 없는 법이다. 만화는 일본, 영화는 할리우드, 드라마는 미국, 모험 소설은 유럽이 강했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우리나라 것이니, 그나마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탐독한 셈이다. 나는 미국 드라마 <타잔>과 <6백만 불의 사나이>를 좋아했다. 모험 이야기는 계림 문고 아동판 소설 <삼총사>와 <괴도신사 뤼팽>에게 끌렸다. 프랑스 작품이다.
그 시절에 왜 나는 TV 영상 대신 종이책 만화를 보았던 것일까?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꼬맹이로 자란 내가 동네를 뛰어다닐 무렵,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열광하는 TV 만화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만화영화가 시작되는 초저녁에 TV가 있는 이웃집으로 놀러 가곤 했다. 그 이웃집에는 한 살 위인 도진이 형이 있었고 새침데기 도미 누나도 있었고 나보다 한 살 어린 도선이와 두 살 어린 도원이가 있었다. 나는 혼자 남의 가족 틈바구니에 앉아 만화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황금박쥐인지 요괴인간인지 타이거 마스크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윽고 방영이 시작되면 숨죽이고 TV 화면을 주시했다. 주제가가 신나게 울려 퍼지고 드디어 시작한다. 무슨 만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냥 요괴인간이었다고 하자.
이런 식이다. 요괴 소년 베로가 낯선 마을에 들어서고 사악한 인간들의 함정에 빠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베로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나는 숨을 삼킨다. 그런데 15분 정도 지난 바로 그 시점에 광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도진이 형은 무심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탁, 하고 꺼버린다. 날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야, 끝났어. 내일 이어서 할 거야.
나는 아쉬웠지만 일어나 집으로 가야 했다. 위기에 빠진 베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궁금했다. 다음날 같은 시각, 나는 다시 이웃집으로 달려간다. 만화영화가 다시 시작된다. 주제가가 끝나고 베로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 이상하다.
어리둥절했다. 어제 마지막 장면에서 위기에 빠졌던 베로가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무대인 새로운 마을로 들어선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도 뭐, 일단 새로운 스토리에 집중한다. 악의 세력과 맞서다가 커다란 위기가 다시 도래한다. 짠, 광고도 다시 도래한다. 탁, 도진이 형이 텔레비전을 꺼버린다. 나를 돌아다본다. 야, 끝났어. 내일 이어서 할 거야.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도진이 형, 도미 누나, 도선이, 도원이 모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잖아. 아,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베로가 과연 위기에서 벗어날까? 벰과 베라는 언제 도와주러 올 것인가. 그런 깊은 고민에 빠져, 우리 집 마당에 이른다.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영 지울 수 없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다. 30분짜리 만화영화가 시작되고 15분 지난 시점에서는 늘 광고가 나온다. 1분짜리이다. 광고가 끝나면 후반부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도진이 형은 내가 얄미웠던 모양이다. 자기네 가족끼리 오붓하게 즐겨야 할 시간에, 자기보다 10배는 더 맑고 똘망한 눈동자를 지닌 나라는 아이가 자꾸 나타나니, 한 마디로 싫었던 것이다. 부모들은 사이좋게 지내라 했지만. 꼴 보기 싫었겠지. 나를 속여 보낸 뒤, 요괴인간이 위기에서 벗어나 악의 세력을 물리칠 때마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손뼉을 쳤겠지.
결국, 나는 TV로 만화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 우리 집에는 왜 텔레비전이 없는 것인가. 어머니에게 하나 사달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웃었다. 턱을 살짝 들어 동쪽 창문을 가리켰다. 저쪽에다 말하거라. 아빠 직장이 저쪽에 있잖니. 아빠 있는 쪽을 보고 사달라고 해. 나는 아버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집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다. 한 달 만에 올 때도 많았다. 나는 TV 만화영화를 포기하고 종이책 만화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화책 <요괴인간>은 한 달에 한 번 나온다. 월간 소년중앙의 별책 부록이었다.
나는 요괴인간에 흠뻑 빠졌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요괴인간의 열정적인 팬이 되었다. 집에서 혼자 놀 때도 요괴인간 흉내를 내곤 했다. 요괴인간의 맏형인 벰이 지닌 지팡이는 선망이 대상이었다. 최강의 무기였다. 나는 기다란 청소용 빗자루 나무를 찾아 양손으로 감아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요괴인간이다!
벰은 악귀를 물리칠 때 양손으로 지팡이를 쥔다. 이 얍, 받아라! 정의의 일격을! 비정하고 호쾌한 웃음을 지닌 베라 역시 매력적이었다. 긴 망토를 휘날리며 채찍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여자라고 깔보던 인간 양아치 무리는 베라의 채찍 한 방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꼬마 요괴 베로는 늘 말썽을 일으키고 사건에 휘말린다. 마지막에는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이들은 착한 요괴인간이며, 정처 없이 이승을 떠도는 방랑객이다. 이들은 사악한 악당의 무리를 혼내주고, 인간을 위해 악귀와 악마를 물리친다. 착한 아이와 착한 어른들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한다. 이들이 착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청소 빗자루를 양손으로 집고서 벰처럼 외쳤다.
(악당 괴물 도진이 나왓! ㅋㅋㅋ)
하루는 월간 소년중앙 신간 호가 나왔길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책값이 200원이니, 남은 돈 300원은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번개처럼 학교 정문 앞 문방구까지 뛰어갔다. 신간 소년중앙과 별책부록 <요괴인간>을 꼭 쥐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뛸 필요가 없고 여유롭게 걸었다.
학교와 우리 집은 꽤 멀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멀면 누구에게나 문제가 발생한다. 사나이 가는 길에 항상 유혹이 있기 마련이니까. 오디세우스를 보라. 그 역시 유혹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뱃기둥에 묶어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유혹을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매혹스러운 마녀 칼립소의 유혹에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소년 오디세우스인 내가 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유혹은 다름 아닌… 그렇다. 달고나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바로 그 설탕으로 만들어진 또뽑기…달고나.
어느 담벼락 아래에서 또뽑기 장사꾼 아저씨가 큼직한 판을 벌이고 있었다. 추석을 앞둔 기념으로 대형 이벤트를 열고 있었다. 아이들이 몰려와 달고나의 별 모양, 하트 모양, 우산 모양 등을 뽑기 위해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학교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나는 호기심에 발길을 멈췄다. 혼잡한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친구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복잡한 무늬를 성공적으로 뽑아내면 상품도 그만큼 큰 걸 가져가는 어린이 도박판이었다.
내게는 도박 게임에 투입할 자금이 풍족했다. 무려 300원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달고나 한판이 10원이나 했으려나…
책값이 200원이니 나머지 300원은 꼭 가지고 와.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지만 나는 망설였다. 한 번만, 딱 하나만 하자.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 다섯 여섯…
친구가 10원만 꿔달라고 하고, 다시 꿔달라고 하고…
나는 안타깝게 실패한 것이 괜히 억울해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도전하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금 300원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잡지 한 권이 200원이었으니 300원이란 돈은 적지 않은 거였다. 그런데 그걸 모두 탕진하고 만 셈이었다. 처음에는 달콤하던 달고나가 쓰디쓴 맛으로 변했는데, 돈도 더는 없으니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터벅터벅. 소년중앙만 유일한 위로였다.
돈 내놔. 어디 있어?
어머니가 300원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 얼굴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면서. 어디 있어? 빨리 내놔. 어머니가 재촉했다.
아, 아니, 저… 저기.
뭐? 저기, 뭐? 너 시방 뭐 하냐? 어서 나머지 300원 내놔.
아니, 엄마, 저… 저기… 저.
뭐?
저기… 저기에서 잃어버렸어. 땅에 떨구었는데 굴러가더니 없어졌어.
뭐! 어디에서?
저, 저기…
어머니는 단호하게 일어섰다. 가자, 어디에서 떨어뜨렸냐. 가 보자. 찾아야지.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돈을 잃어버린 장소까지 가야만 했다. 문제는 돈을 잃어버린 장소가 어디인지 나도 몰랐다. 딱히 어디라고 지목하기 어려웠다. 그런 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어머니를 안내했다. 학교까지 가는 먼 길을 다시 걸어가면서 두리번두리번 머리를 굴렸다. 마침내 적당한 장소가 보였다. 번잡한 시장으로 통하는 내리막길이었다. 거기에서 잃어버렸다고 하면 동전들이 떼굴떼굴 굴러가 한참 멀어졌을 것만 같았다. 나는 땅을 바라보면서 두리번거렸다.
여기, 여기에서 저쪽으로 저기… 저쪽으로.
여기 맞아? 확실해?
어, 아니… 여기인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내가 주저하고 망설이며 확실한 대답을 못 하자, 어머니는 더 이상 화를 참지 않았다. 울컥 폭발했다.
너 사실대로 말해! 어디에다 썼어! 말해!
어머니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이라 나는 그만 울먹이다 울고 말았다. 결국 실토했다. 또 뽑기… 때문에… 추석 기념행사라서…
어머니는 그날 화가 단단히 났다. 집에 돌아와 매를 들었다. 요괴인간 놀이하던 청소용 빗자루를 들고 내 종아리를 때렸다. 어머니가 외쳤다.
이놈아, 거짓말을 해? 거짓말을 해?! 커서 무엇이 되려고! 어디서 거짓말을 해. 이놈아, 사람이 되어야지. 응, 뭐가 될래? 인간이 되어야지, 거시기가 될 거야?! 인간도 아니야. 어디서 감히 거짓말을 꾸며! 거짓말하면 사람 구실 못해! 사람이 되라고! 사람이!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다. 동생은 매 맞는 오빠인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매를 다 맞고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였다. 동생이 다가오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빠, 거짓말하지 마. 사람이 되어야 해.
나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중앙 별책부록 <요괴인간>을 펼쳤다. 아무리 아파도 볼 건 봐야 했다. 게다가 착한 일을 해서 빨리 사람이 되고 싶은 요괴인간 이야기 아닌가. 계속 훌쩍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나의 두 번째 끝내주는 괴물 친구 - 요괴인간
요괴인간은 1970년대 동양방송에서 만화영화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월간 <소년중앙>에서는 별책 부록 만화로 기재되어 어린이 독자의 인기를 차지했다. 일본의 제일동화가 기획하고 우리나라 동양방송의 동화제작부가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한일 합작형태로 제작된 셈이지만 저작권은 일본이 소유하고 있다.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는 자신들이 왜 요괴로 태어났는지 모른다. 자신들이 정의의 편에서 악한 괴수와 사악한 인간을 물리치는 착한 일을 꾸준히 수행하면 언젠가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아닌 신세이기에 집이 없다. 덥거나 춥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야외에서 지내야 한다. 숲 속의 나무나 철탑 또는 철도 다리 난간 등에 매달려 잠을 자기도 한다. 이들은 이동할 때 약간 떨어져서 각자 이동하고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곤 한다. 이야기의 무대는 신비하고 이국적인 곳이다. 유럽의 중세풍의 거리와 건물, 의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동차와 기관총이 공존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적인 동시에 고딕풍의 분위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의 이야기는 아동을 위한 스토리치고는 상당히 우울한 편이다. 소년 요괴 베로가 장난꾸러기 모습을 보여주면서 명랑한 분위기가 다소 깃들어 있긴 하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음산하고 괴기스럽고 우울하다. 결말은 비극에 가깝다.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인간을 위해 악의 무리와 끝없이 싸우지만 결국 이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이들은 인간 세상을 끝없이 배회할 뿐이다. 이들은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진짜 인간의 몸을 찬탈하는 것이다. 하지만 벰, 베라, 베로는 그런 비인간적인 방법을 거부한다.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지우고 육신을 강탈할 수는 없다. 결국 이들은 어디론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머나먼 다른 어느 세상에서 여전히 정의를 위해 힘겹게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는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68년 원작 만화영화 이후에 몇 번 리메이크되었다. 심지어는 실사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종이책으로 처음 접한 소년중앙 부록에서의 모습에 가장 친근감을 느낀다. 김우영 화백의 그림체는 만화영화의 그림체와는 사뭇 다르다. 더 부드럽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의 베라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차갑고 무서운 얼굴이다. 김우영 화백의 만화에서는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물론 악당에게는 가차 없이 무자비하지만. 벰과 베로 역시 마찬가지다. 김우영 화백은 요괴인간의 외형에 다소라도 부드러운 인상을 가미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저작권이 일본에 있기에 표절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한국과 일본 측이 서로 합의해서 만화책으로 발간을 허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표절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우영 화백의 그림체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지 다소 의문스럽기도 하다. 훗날 일본의 다른 감독들이 제작한 애니메이션들도 마찬가지다. 원작의 고딕 분위기는 지워지고, 그저 평범한 괴수물 수준으로 내려앉은 느낌이 강하다.
벰은 언제나 과묵하다. 가장 최강의 악귀와 겨룬다. 베로는 늘 사건의 발단이다. 인간 어린이와 친구가 되고 싶지만, 요괴이기에 우정을 오래 가져갈 수 없다. 여성인 베라는 가장 강렬한 캐릭터이다. 범죄조직의 여두목 모습인 베라는 환각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으며 치유 능력도 지니고 있다. 긴 망토를 걸치고 손목에 채찍을 감고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채찍을 휘두른다. 인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할 때도 많고 벰의 의견에 반대할 때도 많다. 성질은 상당히 급하고 고집도 대단하다. 하지만 벰과 베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여행한다. 70년대 어린이 만화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여성 전사를 꼽자면 단연코 베라의 몫일 것이다.
만화영화 [요괴인간] 오프닝 주제가 듣기
종이책 만화 소년중앙 별책부록 [요괴인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