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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프롤로그

by IanXpaper Sep 03. 2024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1)



내 이름은 팽이언이라고 해 두자. 몇 달 전 -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 퇴직금은 이삿날 전세자금에 보태고 또 개인연금도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사라졌기에 나는 내 방에 눌러앉아 밖의 세상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는 척 지내고 있어야 했다. 방 안에서 넷플릭스를 보거나 아니면 오래전에 사둔 책들을 읽으며 무일푼의 신세를 달래야 했다. 이따금 지하철을 타고 나가서 대형 서점을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직장 다닐 때 우울한 기분을 떨치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교통비조차 아내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므로, 게다가 서점에 가기만 하면 책을 잔뜩 사 오던 과거의 내가 지닌 질주하는 소비 습관에 아내가 이미 질려버렸으므로, 외출을 허락받지 못하고, 결국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서점에 갈 수 없었다.

     

수중에 한 푼도 없으니 서점에 간다고 하더라도 더는 책을 사지 못한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보내달라고, 그저 책 구경만 하고 싶다고, 아내에게 그렇게 간청했다. 단지 혈액순환 조절을 위한 서적 탐방임을 강조했다. 아내는 내가 ‘서점에 간다’라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짜증 나는 과거의 모든 기억이 바닷가 파도처럼 밀려온다고, 특히 분노의 하얀 포말이 끔찍하게 밀려온다면서, 버럭 화를 냈다. 책 구경이라니! 그건 또 무슨 허튼소리야?! 그렇게 힐책했다. 책 살 일이 전혀 없는데, 왜 서점에 가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은 장 보러 갈 일이 없을 때, 구경 삼아 시장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돈 한 푼 없는 주제에 생선 가게에 가서 굳이 고개를 들이밀고 오징어, 갈치, 고등어, 해삼, 멍게 같은 걸 구경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따졌다. 아내의 논리는 언제나 최강이었다. 나로선 아내의 논리 어느 구석에 분명히 허점이 있다고 뭔가 잘못된 논리라고 느끼지만, 체계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반박이라니! 그런 시도를 했다가는 아내의 부아를 쓰나미처럼 치밀어 올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대충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외출을 위한 교통비를 아내에게 받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론 걸어갈 수는 있다. 네이버 지도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교보문고는 목동지점인데 도보로 1시간 40분 거리였다. 카카오 맵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영풍문고는 김포공항점인데 도보로 1시간 30분 거리였다. 어쨌든, 내가 진정 가고 싶은 서점은 광화문과 여의도에 있다.   


무릎도 아프고 해서 그냥 자의 반 타의 반 내 서재에 갇혀 지내기로 한다. 아내는 내가 기거하는 곳을 ‘서재’라고 칭하지 않고 ‘네 방’이라고 평가절하하곤 한다. “네 방으로 가. 어서 가라고.” 아내가 그런 식으로 보통의 독자인 나의 여러 가지 요청을 거절할 때마다 나는 ‘방’이라고 하지 말고 격조 있게 ‘서재’라고 칭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다. 그러면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그래, 그대의 서재로 가시길.”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음 날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면, 아내는 미니멀리즘 대가 답게 원래의 미니멀한 어휘력을 쓰는 인물로 되돌아가고 만다. “네 방으로 가!”     


아내는 단호하다. 남자는 놀면 안 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푼돈이 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외부의 연락이 도착하기 전에는 절약과 절제를 위해 집에서 기거하라는 명령이다. 외출하면 이래저래 돈과 시간만 낭비하게 만드는 게 이 놈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맞긴 맞는 말이다.


아내는 미니멀리즘을 신봉한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때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다양한 방법을 능숙하게 실천한다. 집 안 가구도 단조롭다. 밝은색으로 단순하게 거실을 꾸민다. TV와 소파와 에어컨과 벽시계가 전부다. 커피 테이블도 하나 없다. 나로선 거실에 앤틱한 책장을 하나 들여 소중한 책들도 장식하고 싶지만, 아내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거품처럼 여긴다. 그리하여, 내 방, 아니 내 서재의 풍경은 조금 우울할 수밖에 없다. “내 방”이라니! 가스라이팅은 이처럼 무섭다. 나도 모르게 아내가 사용하는 어휘에 순응해 버리곤 한다.     


여하튼, 내 서재의 풍경은 번잡하고 안타깝고 우울하다. 우선 육 단 짜리 커다란 책장들이 한쪽 벽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런데 책이 너무 많아, 자세히 보면 책장에서 책들이 조금씩 앞으로 삐져나와 있다. 왜 그러냐면, 책들을 책장 깊숙이 넣은 뒤에 다시 앞쪽 남은 공간에다 책들을 올려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양쪽 두 개의 벽에 꽂혀 있어야 할 책들이 한쪽 벽에 이중으로 겹쳐 몰려 있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배치하는 것을‘이중 배치’라고 칭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다만 영어에서는“double parking”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알고 있다. 정중히 번역하면 “이열 주차” 또는 “이중 주차”가 된다. 그러니 서재의 책들도 “이열 배치” 혹은 “이중 배치”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아내는 책장을 새로 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책을 버리라는 파격적인 대책을 제시하곤 했다.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당량의 책을 중고 서점에 넘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서점에 다녀올 때마다 책을 여러 권 사 온 탓에 책의 분량은 쉽게 줄지 않았다.      


이사하려고 하면 포장이삿짐센터의 대표가 사전에 집을 방문하고 견적을 낸다. 그런데 예전에 어느 이삿짐센터의 대표가 내 서재를 둘러보곤 견적을 내긴 냈는데 잘못 내었다. 그는 그저 가볍게 슬쩍 어렴풋이 흩어보곤 말했다. “아 책장이 모두 일곱 개이군요.” 그러곤 책장 일곱 개로 견적을 잡았다. 그런데 사실 책들이 이열 배치된 것을 몰라본 것이었다. 책장은 일곱 개이지만 실제로는 열네 개의 책장에 들어가야 할 분량의 책들이 빼곡히 이중으로 겹쳐 있음을 간과한 것이었다. 책장 열네 개로 견적을 내야 하는데 일곱 개로 잡았으니 무척 억울한 일이 되고 만 셈이다. 막상 이사하는 날에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책이 이렇게 많냐며 목청을 높이는 거였다. 다행히 상당수 책을 미리 내가 직접 상자에 담아 정리해 두었기에 큰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맙게 여기는 직원도 한 명 있었음에…2)      


번잡한 내 서재에는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내 서재를 물보라 여인숙이라고 칭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내가 기거하는… 막장 토론도 하고… 글을 쓸 때 목청 큰 간섭도 받는… 추억이 얽힌 책들도 여기에는 많다.      


이제, 그 추억의 그림자와 하나둘 마주하고 대화하고 싶다. 별 볼 일 없는 지난 세월의 기억과 대화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기억이란 게 대개 물보라 안개 속에 잠겨 있고 그저 흐릿하기만 하니까.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1) 『모비 딕』의 첫 장 제목인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에서 따왔다. 이 글의 도입부의 첫 단락 문장도 존경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첫 장면 도입부를 모방하여 작성했다. 너무 근사한 도입부이다. 이른바 오마주라고나.     


2) 훗날 다시 또 이사하게 될 때 벌어질 일이 걱정되곤 한다. 우울한 상상이 시작된다. 이러하다. 이삿짐센터의 전문요원인 A 씨는 자기가 아는 한 책이 엄청 많은 집은 딱 두 종류라며 책 정리를 돕던 내게 말을 건넨다. 교수님 집이거나 목사님 집이거나. 그런데 이 집은 목사님 집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책들을 보니 성경이나 철학적인 책은 별로 안 보이고 좀 특이한 제목의 책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교수님 집도 아닌 듯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특이한 책들은 바로 『악마의 사전』과 『지옥 사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드라큘라』와 『피로 물든 방』 같은 제목의 책도 A 씨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다. 그 아래에 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몬스터. 몬스터 홀릭』이라는 괴상한 책도 수상하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라는 책은 또 뭔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꽤 알려진 책이지만, “그리고 좀비”가 달라붙은 책이라니? 다른 칸에는 『보트 위의 세 남자』가 있고, 그 옆에 『자전거를 탄 세 남자』가 있다. 다시 그 옆에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가 있다. 전부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A 씨가 일련의 수상한 남자들의 무공담을 책장에서 꺼내어 모두 정리한다. 그런데 그 칸 안에 다른 책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와 『채털리 부인의 연인』 등 다수의 여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요원 A 씨는 집주인의 취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약간 흐려진 맑은 눈을 옆으로 돌린다. 옆 칸에도 수상한 책들이 잔뜩 있다. 『제인 에어 납치 사건』이라니, 제인 에어를 납치한다고? 그 옆에는 아주 오래된 낡은 문고판 『토라진 아가씨』와 『행운의 다리 미녀』가 나란히 선정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인문학 코너인 듯한 책장에는 『유혹의 기술』이 단연코 통속적으로 여겨진다.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책은 ‘서재’라는 이름의 여자를 결혼시키는 내용일까? 그런데 바로 옆에 호러 문화를 찬양하는 『죽음의 무도』가 있다. 결혼시키기라는 내용의 책 옆에 죽음의 무도라니? 결혼과 죽음은 연관성이 깊다는 걸 주장하는 듯하다. 신혼인 전문요원 A 씨는 이런 무도한 배치에 상당히 충격을 받는 표정이다. 책의 분류 기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이다. 잠옷 차림의 미끈한 다리가 돋보이는 표지를 지닌 정혜윤의 『침대와 책』은 제목이 수상하면서도 딱히 야릇한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해 보인다. 이윽고 A 씨는 책을 통해 내 직업을 파악하는 일을 포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뭐 하시는 분인지요?               

댓글23
작가가 이 댓글을 고정했습니다.
도란도란 이미지
Sep 03. 2024

종이님^^
서재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들 하지요.
저도 교수도 목사도 아닙니다.
전 온갖 책을 사서 색깔별로 꾸미길 좋아해요^^
위험한 검은색과 빨간색 책들,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과 노란색 책들,
기이한 무늬에 책등에 제목조차 없는 괴물선집과 동서양의 귀신들 .
무당, 사이비 교주, 종교 관련 직업 아닙니다^^
알록달록한 세계문학전집들.

이사갈 때 책은 손수 포장해 둡니다. 정리도 제가 합니다^^ 옮겨주시는 것만으로 거듭 감사하다 굽신거려야 합니다.

마라톤을 시작하세요. 매일 10km씩 뛰다보면 여의도까지 왕복 가능하실 거예요ㅎㅎㅎㅎ
러닝화는 하나 구매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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