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을 펼치고 목차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1장과 2장을 두고 어느 곳을 읽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1장 제목은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다듬는 방법>이고, 2장 제목은 <쓰는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사실 앤 라모트의 이 책은 오래전에 다 읽었고, 그 뒤로는 생각날 때마다 여기저기 펼쳐 읽곤 했다. 재출간되기 전의 제목은 『글쓰기 수업』이고, 원서 제목은 『Bird by Bird』이다. 직역하면 “새 한 마리 한 마리”정도가 되겠다.
앤 라모트의 글쓰기 수업 - Bird by Bird !
앤 라모트는 무슨 수를 써서든 책을 읽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작가였다. 어느 날, 열 살이던 앤 라모트의 오빠가 학교 과제로 새에 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애를 먹고 있었다. 3개월 동안 한 줄도 못 쓰고 마감이 다가왔다. 가족이 휴가를 온 오두막집의 부엌 식탁에서 앤의 오빠는 절망에 빠졌다. 종이와 연필과 새 도감을 앞에 두고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그때 앤의 아버지가 옆에 앉더니 오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나씩 하나씩. 새 한 마리 한 마리 차근차근 처리하면 돼.”
앤 라모트는 이 이야기가 글쓰기의 절망에 빠진 작가 지망생들에게 활력을 되살려 주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영어 제목 "Bird by Bird"는 이 희망적인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이다.
아내가 3시에 출발하자고 소리쳤다.
나는 소설을 쓴 적이 있고, 어느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다. 주목받은 적은 없다. 직장 생활이 바빴고 술도 자주 마신 탓에, 글 쓰는 일에서 늘 미끄러지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내가 문학에 빠져 지내는 줄로 알고 있는 친구도 있다. 제일 좋아하거나 자주 읽은 책이 뭐냐고 묻는 젊은 친구도 있다. “나도 글 써보고 싶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친구나 후배들.
내가 가장 자주 읽는 책은 수리통계학 원서이다. 이제 절판이 되고 구글에서 검색하면 PDF 파일로도 얻을 수 있다. 제목은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Statistics (3/e)』이다. 대학원 시절 수업 교재였다. 지금은 낡았다. 깨끗한 새 책을 세 권을 더 구매해 모두 네 권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자주 읽기 위함이다. 네 권 모두 낡아 버릴 때까지. 현재는 두 번째 책이 낡아가는 중이다.
수리통계학 책을 읽는 이유가 뭘까.
전공과 직업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 읽는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무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논리의 세계는 천상에 머무는 느낌을 준다. 기호로 전개되는 여러 개념과 정리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일은 몰입의 경험을 선사한다.나는 그게 좋다. 통계는 불확실성을 다루고 리스크를 측정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수학과 통계의 세계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사라진다. 나는 그게 좋다.
가장 많이 자주 들여다보는 책.... <수리통계학>이라고 하면 별로 안 믿는다. 할 수 없이 인증 샷을 찍었다.
학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보상심리일지도 모르겠다. 글쎄, 딱히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으나 그런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사실 명백한 목적 없이 수리통계학 책을 되풀이하여 읽는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일종의 정신병 아닌지, 간혹 의심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여러 번 읽어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꽤 많다는 것이다. 맥락은 막연히 이해하지만, 명쾌한 깨달음은 얻지 못한 것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어야 한다. 수학의 세계는 원래 그러하다.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아는 지점으로 굴러 내려와 다시 천천히 되풀이하며 올라가야 한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따로 없다.
오후 3시. 아내와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아내가 운전하기로 한다.
명절이 오면 사람들은 고향을 방문한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 나의 본적은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이다. 태어난 곳은 어머니 고향을 따라 전라북도이다. 자란 곳은… 자란 곳은 뒤죽박죽 여러 곳이다. 경기도, 서울 각 지역 등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 일하는 곳이 자주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경기도의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놀던 시절, 출장이 많은 아버지가 하루는 일찍 집에 오셨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안아주셨다. 우리에게 선물이 있다고 하셨다. 첫 번째 선물은 육중한 박스에 담긴 냉동육류였다. 우리와 함께 살던 외사촌 누나 두 명과 어머니는 박스를 개봉한 뒤에 감탄사를 질렀다. 으악, 생전에 이만한 고기는 처음이다!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의 미국인 친구가 준 미국 만화책이었다. 요즘은 그래픽 노블로 알려진 미국 만화는, 당시에는 얇은 낱권으로 발매되었다. 영어로 된 만화책이기에 초등학생인 내가 읽기에는 어려웠다. 아버지의 미국 군인 친구가 철 지난 3백 권 정도의 만화책을 포장하여 아들인 내게 선물로 주라며 건넸다고 한다.
오후 4시 50분. 절에 가서 장인 어른과 내 아버지를 추모했다.
미국 만화책? 차 안에서 딸이 물었다. 영어로 된 것을 초등학생인 아빠가 읽을 수 있었어?
천하무적 강철의 슈퍼맨
어둠의 기사 배트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슈트의 영웅 아이언 맨
인크레더블 헐크
천둥의 신 토르
카우보이 밧줄의 원더우먼
…
…
이들 슈퍼히어로가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었지만 꼬맹이인 나는 만화를 통해 열심히 탐구했다. 생각해 보면 특이할 정도로 경이롭게 느껴진다. 별 것 아닌 만화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의 나를 상상과 모험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들이다.
영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하다. 만화의 영어 어휘를 전혀 몰랐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려워도 한참 들여다보면 스토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표정과 행동으로. 만화라는 그림이 지닌 장점이었다.
나의 해석 - 스파이더 맨, 일단 도망 가! 경찰이 미쳤나!??!
그 시절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딱 하나 있었다. 스파이더맨이었다. 스파이더맨은 악당을 물리치고 위기의 시민을 구해주는 영웅이었다. 그런데 왜 항상 경찰에게 쫓기는 것일까? 스파이더맨이 거미 무늬의 스파이더 지프차를 타고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의 무리에 쫓기는 장면을 보고 어린 시절의 나는 황당했다. 의아했다.
뭐야 왜 경찰이 스파이더맨을 잡으려고 하는 거지? 미친 것 아닌가?
내가 성인이 되고 나니 할리우드 영화제작사들이 슈퍼히어로 주연의 마블 영화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느 직장동료 후배는 마블 영화에 환호하고, 자신이 국내 출판된 마블 그래픽 노블을 전부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나는 마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꼬마 시절에 이미 충분히 맛본 것들이었다. 이따금 영화를 시청하지만, 환호성을 지를 만큼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슈퍼맨이 지진으로 갈라진 도심의 거리를 꿰매는 만화 속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지그재그 엉망으로 찢긴 땅을 슈퍼맨이 커다란 고래잡이 작살을 바늘처럼 이용해 꿰맨다.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마치 할머니가 찢어진 옷을 꿰매는 그것처럼 지구 땅덩어리를 꿰맨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번개처럼 공중전화 북스에 들어가 넥타이와 양복을 풀어헤치며 파란색 바탕의 선명한 붉은 S자 무늬를 가슴에 드러내며 변신하는 슈퍼맨은 얼마나 멋진가. 다만, 열 살 꼬마일 때 말이다.
나의 해석 - 슈퍼맨은 바쁘다!
오후 6시 10분. 동네 마트에 도착했다. 딸이 추석기념으로 한턱낸다며 삼겹살과 과자와 음료수를 마구 샀다.
그럼, 그 시절 아빠는 책이 아니라 만화책을 좋아한 거네. 딸이 말했다.
만화책만 보고 자란 거 맞네, 네 아빠 그래서 아직도 만화스러워.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부모는 자식 교육에 열정을 다한 분들은 아니었다. 앤 라모트의 아버지처럼 작가도 아니었고 어머니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한 적이 별로 없었다. 먹고살기 힘들어 집 장만 하나에도 빠듯한 시절이었다.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도 없었다. (학교 공부는 모두 다 잘했으니까. 하하.)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가 책 좋아하는 것 하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특별 과외를 시켜 준 적도 없고, 멋진 가방이나 고급 샤프를 사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책은 마음껏 지원했다. 계림 문고 아동판 세계문학 전집과 어린이 잡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미군 부대에서 만화책을 가져온 것만 봐도 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아는 분이었다.
우리 집에는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출판사 외판원도 있었다. 자주 와서 이런저런 책을 소개하곤 했다. 어머니는 늘 내 의견을 먼저 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외판원 아저씨에게 대범하게 말했다. “이 책은 아동용이라서 원래 줄거리를 확 줄인 거잖아요. 축소판이 아닌 원작을 읽고 싶어요.”
그러자, 외판원 아저씨가 어머니를 보며 능글맞게 대처했다. “아, 뭐, 주인공들이 밥 먹고 똥 싸고 물 마시고 오줌 싸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읽을 필요 있나요? 빨리빨리 읽어야 아드님이 어서어서 크지 않겠나 싶구먼. 허허허.”
어머니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판원의 말에 기분이 상했고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날 깔보는 거네.
옆에 있던 낭랑 스무 살의 외사촌 큰 누나가 눈을 반짝였다. 외사촌 누나는 『여성 대백과 사전』에 관심이 있었다. 책 열 권 분량의 두께를 지닌 한 권짜리 두터운 책이었다. 그 안에는 결혼을 앞둔 숙녀를 위한 다양한 지침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뜨개질하는 법에서부터 차와 요리 만드는 법. 교양 있는 숙녀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하는 동서양 미술사와 역사. 가정 응급 처치법. 임신과 태교를 위한 지침.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하는 클래식 등등. 외사촌 큰 누나는 그 책을 소장하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책까지 사달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림 문고 아동 세계문학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이미 모두 읽었던 나는 어머니에게 누나가 좋아하는 『여성 대백과 사전』을 사자고 했다. 사실은 정확한 기억이 없다. 그것을 내가 사자고 했는지 아닌지… 흐릿하다. 분명한 것은 외판원이 권장한 어린이용 책들은 단 한 권도 사지 않았고 『여성 대백과 사전』은 사촌 누나가 그 뒤에 매일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호기심에 그 책을 훔쳐보곤 했다. 여자들의 세계가 거창하고 흥미롭군… 하면서.
우리 집에서 남자는 거의 나 혼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여자 동생들과 어머니와 외사촌 누나 두 명. 아버지는 국내와 해외 출장을 자주 가시곤 했다. 집에서 남자는 나 혼자나 다름 없었다. 가끔 이모님이 서울에 맡긴 딸들을 보고 싶어 올라올 때도 있었다. 바쁜 아버지는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귀가할 때가 많았다. 『여성 대백과 사전』이 우리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할 책이라는 점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마루에 앉아 백과사전을 들여다보던 외사촌 큰누나가 떠오른다. 수박을 가지런히 잘라 놓고 가족을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도. 그 무렵 우리 가족은 꽤 오래 살았던 경기도의 논밭 마을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초등학교 5학년이어서 좋았다. 그 시절에 서울에도 마당 있는 집이 흔했다. 나팔꽃과 샐비어꽃 피는 화단과 지하수를 퍼 올리던 펌프를 지닌, 마당 있는 그 시절의 집이 가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