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내가 정확히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난 어른이야! 하고 외친 순간이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어른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스물다섯 살에는 ‘꺾어진 오십’이란 농담이 무척 슬펐는데, 이 역시 나이만 먹고 어른스럽지 못한 감정 때문이었다. 이런 감정은 삼십 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왜 여전히 온전한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걸까?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과 대학에서 첫 수업을 듣던 날, 내가 성장했다는 막연한 감정은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라고 온전하게 믿을만한 확신은 얻지 못했다. 모든 게 어설프고 낯설게 느껴졌다. 군대에 가던 날의 두려움도 떠오른다. 훈련병 시기를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도 나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부하지 못했다. 오히려 선임 병사들의 눈치만 보며 훨씬 더 어려진 느낌만 가득 지녔다. 복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자주 고민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별다른 신념도 없었다. 그럭저럭 첫 직장을 갖게 되어 처음 출근하던 날에도 나는 불안감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차츰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월급으로 백화점에 가서 부모님에게 드릴 내복과 양말 등을 사고 나서, 나 자신을 위해 넥타이를 하나 골랐을 때, 아주 잠깐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만족감을 느꼈다. 한순간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미의 어른스러움을 맛본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어른스럽다는 건 어느 한순간에 결정적으로 도래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한발 한발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점차 하나의 실재감으로 얻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친구는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것저것 자랑하기도 했다. 내게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순간이 어딘지 모르게 과장되거나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자신들이 어른이 되었다고 믿기 위한 억지스러운 의식(儀式),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행위로 느껴졌다. 여자와 처음 섹스한 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 날이라고 주장하는 친구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고백하건대, 첫 섹스는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우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른이 되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오히려 도대체 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하는 자괴감에 시달린 날이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떠오르는 내 과거 속의 모든 순간이 저마다 조금씩 '어른이 된 날'의 후보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내가 어리다는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난 날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 넘치게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처럼 둔감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이 사회가 일부러 ‘성년식’이라는 날을 젊은이들에게 선사하는 것일지도. 성년식처럼 획일적인 통과의례는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의식에 불과하다. 만 19세가 되는 젊은이들에게 그해의 5월 셋째 주에 성년이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이 표준적인 선언식이란 것은 도무지 요령이 없어 보인다. 화석이나 다름없는 조선 시대의 성년식을 성의 없이 복원한 불필요한 이벤트라고나 할까. 오히려 원시적인 삶의 양식을 간직한 아프리카 원시림의 일부 부족들이 해마다 거행하는 성년식이 훨씬 더 엄숙하고 황홀하고 깊이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케냐 북동부에 있는 삼부루족이라는 종족의 성년식이다. 그들은 아직도 원시 종족의 생활상을 지니고 있다. 유목 생활을 하는 그들은 낙타 등 가축의 피와 우유만 먹으며 자신들을 '붉은 전사'로 여긴다. 이 부족의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스러운 용맹심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고통을 참는 훈련도 받는다. 생살을 찢는 의식을 통해 남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윽고 15세가 되면 성년식을 치르고 할례를 받는다. 이런 의식에 비해 나의 15살은 실로 보잘것없었다. 15세 무렵의 나는 이웃집 여학생이 줄넘기하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몰래 훔쳐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괜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 씁쓸한 기억이 남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고통이나 불안, 혹은 창피한 상황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당당히 맞서 나갈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게 아닐까.
(계속)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대문 출처 : 움베르토 보초니, <거리의 힘들>과 <동시적 시각들>에 대한 연필 습작. 1911년 작품. 저의 연재 소설 <듀오 헤븐>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