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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Oct 23. 2024

여름의 눈 (6)

단편소설 

여름의 눈 (6) 



  다음 날 대학 동창 한 명에게 연락해서 차를 빌렸다. 급하게 지방에 내려가야 하는 데 차가 필요하다고 둘러댔다. 친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차를 빌려주었다. 나는 연립주택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한 뒤에 어두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방으로 돌아와 커다란 여행 가방에 이진의 시체를 넣었다. 인터넷에서 지도 검색을 하며 시체를 버릴 장소를 물색했다. 경기도나 강원도의 저수지 혹은 인적이 드문 호수 같은 곳을 찾아보았다. 강원도 산골의 한적한 S읍에 있는 호수가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진을 담은 가방을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어두운 도심을 빠져나가 밤의 국도에 들어섰다. 과속 단속카메라에 걸리면 훗날 경찰에 단서를 남기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해도 과속하지 않았다. 밤의 국도는 한적했다. 평일 밤이었기에 텅 빈 도로를 혼자 달렸다. 초콜릿을 먹었지만 우울했고 지친 내 영혼을 달랠 길은 없었다. 국도는 끝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밤하늘에는 달빛을 삼킨 구름이 흘러갔다. 그때마다 이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면 위로 달빛이 내렸다. 잔잔한 물결이 은은하게 빛났다. 밤은 마치 꿈결 속의 다른 세상 같았다. 나는 이진이 들어 있는 가방을 끌고 나무숲을 지나 호숫가로 내려갔다. 이진을 가방에서 들어냈다. 잠옷 차림의 흰 맨살이 드러났다. 나뭇가지와 거친 잡초 때문에 이진의 팔다리에 생채기가 나는 것 같았다. 땀을 흘리며 이진을 물가로 끌어내렸다. 달빛 아래에서 호수의 수면이 차가운 숨결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다. 잠시 이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작별의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사랑. 나는 호수의 중심을 향해 이진을 천천히 밀었다. 내 사랑. 굵은 나뭇가지로 시신이 호수 가운데로 흘러가도록 했다. 이진은 고요하고 창백한 수면을 떠돌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순간, 이진의 하얀 다리가 은은하게 빛났다. 이내 어두워졌다. 구름 사이로 달이 다시 나왔을 때 더는 이진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거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앉아 있었다. 물결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얼마 뒤 나는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어갔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산길을 떠나 다시 국도로 접어들었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달리며 음악을 들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모모코의 노래를. 


  다음날 집안의 화초가 말라죽은 걸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집 밖에 내다 버렸다. 이진에 관해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신분이 확실한 여자가 아니었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본 적도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속한 세상과는 관련 없는 존재였다. 어쨌든 이진과 나의 동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진의 피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진에 대한 충격이 조금 희미해질 무렵, 나는 본래의 시시한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서너 개의 번역 일은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출판사는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집세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엉터리 초콜릿을 만들어 유흥가에서 팔았지만 이내 그것들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다. 내게 분노하고 앙심을 품은 거래자들에게 심하게 얻어터진 뒤 밤거리의 골목에 버려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쑤시고 아팠다. 나는 중얼거렸다. 끔찍한 일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그것은 모두 꿈이었을까? 나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어. 


  비에 젖은 뒷골목에서 비틀거리며 기어 나와 몇 걸음 걸었다.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배기가스와 쓰레기 입자가 섞인 공기가 내 육신을 훑고 지나갔다. 길가의 신문지 조각과 비닐 백 무더기가 바람에 날려 발목에 걸렸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다시 길 위에 쓰러졌다. 눈앞이 자꾸 흐릿해졌다. 한 쌍의 남녀가 나를 피해 멀찍이 돌아서 지나갔다. 약물 중독자인가 봐.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길 위에 서서 가슴을 웅크린 채 간신히 얼굴을 들었다. 


  어지러운 불빛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구둣발 소리가 어디선가 들었던 것처럼 귀에 익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무심하게 걸어오는 소리. 밤을 걷는 소리. 세상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긴 그림자의 소리. 불빛 아래 여자의 모습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자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걷는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일시에 환해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떨리는 몸을 감싸 안은 채 다시 여자를 살폈다. 이진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차분하게 다문 입. 출렁이는 머리카락. 손짓과 걸음걸이와 다리의 윤곽까지 내가 기억하는 여자. 이진. 그래, 이진은 살아 있었다. 여자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여자는 점점 멀어졌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간신히 중얼거렸다. 이진. 


  멀어져 가던 여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먼 곳의 불빛이 여자의 얼굴 위에 어른거렸다. 여자는 평온한 얼굴로 맞은편의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자신이 머물 곳을 찾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빛이 사라지고 여자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잠겼다.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여자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그때 어둠 속 얼굴 위에서 뭔가 반짝였다. 그렇다. 하얀 송곳니였다. 내 청춘의 전부였던, 내가 사랑했던, 여름의 눈처럼 너무나 하얀, 바로 그것.          



(끝)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결말을 더 고민하고 나서, 며칠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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