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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May 18. 2019

오버 더 레인보우

오늘 뜬 무지개

며칠간 제주는 무척 더웠다. 제주만 더웠던 건 아니겠지만.


어제부터 추워진 날씨가 비로 이어지더니 오늘은 폭우 예보가 있었다. 바깥에 나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후부터 해가 보였다.


해는 쨍쨍한데 빗방울은 날리는 이상한 날씨. 아마도 '역동적인 안개' 속에 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흐린 날 이만큼의 빗방울이 떨어진다면 분명 우산을 썼을 텐데, 햇빛이 강하다 보니 금방 마르겠지 싶어 우산 없이 걸어 다녔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 듯했다.


볼일을 보고 집에 갈까 하다가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를 걷는데 아는 분이 제주 사진을 보내왔다. 쌍무지개가 뜬 맑은 하늘. 장소는 한라산 어리목 입구 근처인 것 같았다.


아, 같은 제주에 있는데 나는 못 보고 있는 걸 이분은 보셨구나.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그분은 워낙 선한(?) 일을 많이 하셨으니 이런 선물 받아도 마땅 것 같았다.


작년 여름, 태풍이 제주를 지나갔을 때 나는 잠시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태풍 때문에 예정된 날짜를 지나 내려왔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제주 섬 위에 뜬 흐릿한 무지개를 보았다. 그것이 제주에서 본 유일한 무지개.


이번에도 땅 위에선 무지개를 못 보네 싶어 무척 아쉬웠지만, 나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으니 바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못 가진 것에 불평하기보다는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하늘 위에 파도처럼 몰아치는 구름, 마을을 덮고 있는 소용돌이 구름... 큰 비가 내린 뒤 자연이 부리는 마법을 구경하며 겨울에 걸었던 익숙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좀 더 가다 보니 거짓말처럼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사진처럼 선명하지도 않았고 쌍무지개도 아니었지만 '빛의 산란 효과에 의해 하늘에 나타난 자연현상'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같은 제주 땅 위에서 나는 무지개를 못 봤다고 불평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바다와 하늘 풍경에 감사한 행동에 작은 선물이 내려진 것 같았다. 그동안 선하게 살아 온 그분보다는 덜하겠지만 '너도 선하게 산 편이니 요만큼은 보아라' 하고 배달된 것 같았다.


그 선물에 감격해서 걷고 또 걸었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무지개의 반대편은 한라산 자락인 것 같았다. 한라산 중턱에도 곱게 갈라진 빛들이 비치고 있었다.


지금보다 공기가 깨끗했던 어릴 적엔 수도권에서도 무지개를 종종 보았던 기억이 난다.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한 무지개 뜬 날.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면서 내 마음도 싱숭생숭해졌다.


7시가 넘어 해넘이가 가까워지는 시각.

좀 더 걸어 무지개가 있는 곳까지 왔는데 갑자기 아무 색깔도 안 보였다. 마치 한 발자국 차이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뒷걸음질 치며 무지개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앞으로 가야 했기에 직진만 했다. 더 이상 무지개는 보이지 않았다.


해 질 시각이라 그런지, 보는 각도가 달라져서 그런지, 구름이 해를 가려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아쉽게, 또한 한순간, 무지개와 작별했다.


좀 더 걸어 이젠 무지개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았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 무지개가 보이지 않게 된 그 순간, 어쩌면 난 무지개 속을 걷고 있었던 건 아닐까. 멀리서 보면 나는 무지개 속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장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사라졌다고 믿은 그때, 어쩌면 나는 그 속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태풍이 휘몰아쳐서 얕은 바다의 물을 심해의 물과 섞어 놓아야 어종도 다양해지고 해양 생태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번 같은 폭우와 강풍이 지나가고 나면 하늘은 평소와 다른,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 삶에 예기치 않게 닥치는 폭우와 비바람, 태풍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선물을 받았던 오늘.

이 자연을 만드신 분께, 폭우와 바람과 하늘과 구름을 만드신 분께, 가끔 무지개도 보여 주시는 분께 감사하고 싶다.


* 저작자의 허락 없이 올리는 무지개 사진이지만 이해해 주실 거라 믿는다. (괜찮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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