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2

by 바비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 251)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 311)



내가 아홉 살 때, 엄마가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아이가 다섯인 집에 아빠 혼자서는 집안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침에는 외할머니가 오시고 저녁에는 옆집 할머니가 왔다. 아빠는 할머니에게 내 머리만 감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밥도 해주고 누룽지도 만들어 줬다. 할머니는 잔소리도 안 했고 다정했다. 다섯 아이를 키우느라 엄마는 한 번도 다림질을 해주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내 옷을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줬다.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아이는 전교에 나 하나밖에는 없었다. 나는 전교 1등이라도 된 듯이 고개를 뻣뻣히 들고 다녔다. 할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줬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람처럼 빨래를 했고 양말을 접었다. 엄마가 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도 나는 할머니를 따라 할머니네 집으로 갔다.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할머니와 잠을 자면서 알았다. 할머니는 잠을 자지 않았다.

잠깐 잠들었어도 소리를 지르거나 걸어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가 죽을까 무서웠다. 컴컴한 방안에 할머니 혼자 지냈을 밤들이 무서웠다.

할머니는 이북에 아이와 남편을 두고 왔는데 그 아이들이 밤마다 찾아온다고 했다.

그 고통을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이들의 사랑을 나는 감히 말할 수조차 없다.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너무 흔하다.

내 아이들은 세월호에 타지 않았고 핼러윈 날, 이태원에서 내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제주에 살지 않았고 내 형제자매는 운 좋게 광주에 가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성수대교를 건너서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빗겨주던 손길이 무서운 고통이었겠구나.

평생을 편하게 잠들지 못했던 할머니.

나는 사랑을 모른다.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아는 것.


지금까지 내가 목숨을 버티고 살아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 목숨 위에는 다른 목숨이 붙어 따라다녔다. 나는 그들 대신 살고 있다. 이들의 비명이 자꾸만 나를 깨운다.

다 지난 일이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런데 나도 죽어간다. 내가 외면했던 시체더미 속에 나도 있다.


내 피를 내어 나눠주고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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